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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소설] 욕실재판
소란스러운 샴푸통과 생리대, 컵은 변기의 뚜껑이 열리자 금세 입을 다문다. 변기통 안의 노란 변기 세정제가 불쑥 고개를 내민다. 높다란 변기 위에 선 세정제는 짐짓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사건번호 117호 재판 시작하겠습니다."
이 조그마한 재판장에는 질서를 지키기 위해 서있는 경찰도 없다. 서랍장 안에 들어있는 옷가지와 생리대는 얌전히 재판이 진행되는 모습을 지켜보았으니, 부러 누군가를 세울 이유조차 없었다.
"피고인, 휴대폰"
"네"
피고인석에 앉아있던 휴대폰이 재생되는 음악의 음량을 줄였다. 세정제가 헛기침을 한번하고, 덜 걸걸한 목소리로 안내했다.
"피고는 일체의 진술을 하지 아니하거나 개개의 질문에 대하여 진술을 하지 아니할 수 있습니다. 진술을 하지 아니하더라도 불이익을 받지 아니하고, 진술을 거부할 권리를 포기하고 행한 진술은 법정에서 유죄의 증거로 사용될 수 있고, 신문을 받을 때에는 변호인을 참여하게 하는 등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미 수없이 반복된 터라 세정제는 진술거부권의 내용을 기계처럼 읊었다.
"재판장님!"
"...예."
휴대폰이 말을 걸자 세정제는 언짢은 기색을 감출 생각도 않았다.
"해당 사건을 올바르게 판단하고 제 시간에 재판을 끝내기 위해서는, 검사를 바꿔야하지 않겠습니까?"
휴대폰은 고개를 틀어 검사자리를 쏘아보았다. 샤워기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길다랗게 이어진 호스를 꼬고 풀기를 반복했다.
"아... 기각합니다. 검사를 바꾸기엔 시간이 부족합니다."
세정제의 무심한 대답에 휴대폰은 열이 올랐다. 이 재판은 짜고 치는 고스톱이나 다름없었다. 방청객이랍시고 온 샴푸통은 머리에 든 것이 없었고, 옷가지들은 제 일이 아니니 구경이나 할 뿐이었다. 하! 휴대폰이 코웃음을 치고 재생 중인 노래의 음량을 높였다. 욕실 타일에 부딪혀 마구잡이로 울리는 노래에 세정제가 인상을 썼다.
"피고! 음량 줄이세요!" 세정제가 소리쳤다.
"예? 멀어서 안들려요!"
휴대폰은 고개를 처들었다. 변기 위의 세정제는 짜증섞인 한숨을 쉬었다. 휴대폰은 세정제가 내려오길 원하는 것이다. 유치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지만, 이 상태로는 법정을 이어갈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세정제는 변기에서 뛰어내렸다.
철퍽! 물기어린 소리가 났다. 선반 속 옷들은 숨을 죽이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재판장이 죽으면 누가 이 사건을 재판해주려나? 타살인지 자살인지 재판해야겠지? 아니야, 이건 시비를 건 휴대폰의 죄가 명백하잖아, 여기 다 목격자고! 그러니까 형량만 정하면 될거야.
그들의 기대에 아쉽게도, 세정제는 한층 넓적해진 앞면을 구부리고 몸을 일으켰다. 휘둥그레 뜬 눈으로 자길 바라보는 휴대폰에게 다시 한번 경고했다.
"피고, 음량 줄이세요!"
휴대폰은 대답하지 않았으나 음량은 줄였다. 영 마뜩찮은지 인상을 구겼다. 세정제는 휴대폰이 인상을 쓰든 말든, 음량을 줄이는 것만 확인하고 곧장 돌아서 적당한 자리를 잡았다. 세정제가 자리잡은 변기 앞쪽은 피고와 검사가 잘 보이는 위치였다.
"재판장님."
"아, 심문 하시죠."
"감사합니다."
샤워기가 뱀처럼 호스를 움직여 피고석에 앉은 휴대폰의 앞에 섰다. 방금 전 세정제를 조심스럽게 재촉하던 모습과 영 딴판으로, 휴대폰에게 지나치게 가깝게 다가왔다.
"피고, 피해자에게 달리 할 말 없으십니까?"
"피해자요?"
"그럼요! 당신이 방조하는 동안 죽어갔던 피해자 말입니다!"
"아..."
휴대폰은 기억을 떠올려보았다. 그랬던가? 사실 사건도 참석하라니 불려왔을 뿐 제대로 알고있는 것은 없었다.
"자! 증인으로 피해자의 일을 뒤이을 칫솔을 모셨습니다!"
빳빳한 칫솔모를 가진 칫솔이 쭈뼛쭈뼛 샤워기의 눈치를 보았다. 샤워기가 느긋하게 칫솔을 재판장 한 가운데, 증인석으로 인도하자 다리를 벌벌 떨었다. 휴대폰은 그 모습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와, 새삥이네. 지루할 정도로 꾸준한 이 재판을 보다보면, 저 칫솔도 금세 적응하리라. 휴대폰은 예상했다.
"재판장님." 샤워기가 재판장을 재촉했다. 그제야 한발짝 뒤에서 상황을 구경하던 세정제가 말했다.
"증인, 위증하지 않을겁니까?"
"어.. 네?"
생전 처음 듣는 단어에 칫솔이 당황했다. 세정제는 한숨을 참았다.
"... 거짓말 하지 않을거지요?"
"아, 네!"
어쩐지 어린아이를 다루는 듯한 말투에도 칫솔은 별다른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 찬장에 있던 샴푸통이 키득대는 소리는 물소리에 묻혔다.
"증인, 칫솔이시죠?"
"네 그렇습니다."
"그럼 칫솔의 교체 주기에 대해서도 잘 아시겠네요?"
"네 그렇습니다!"
"교체주기가 어느정도 되나요?"
"아, 칫솔모가 닳으면 교체하는데 의사들은 3개월 주기로 교체하기를 권장합니다."
칫솔은 자신이 아는 것을 최대한 침착하게 대답했다. 말실수에 너무 신경을 쓴 나머지, 주기를 대답할 때 샤워기와 휴대폰의 희비가 교차하는 것은 볼 생각도 하지 못했다.
"..아, 그래요?"
"으하하학!"
샤워기가 한박자 늦게 대답하자 휴대폰은 웃음을 터트렸다. 드물게 당황하는 모습이 너무나 통쾌했다!
"검사님."
휴대폰이 한글자 한글자 유쾌함을 담아 샤워기를 불렀다.
"예."
"피해자가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가 언제인지 기억하십니까?"
"... 아뇨."
"아, 그렇습니까? 저는 그때가 아마, 10월이었다고 기억하는데요."
휴대폰이 샤워기의 반응을 더 살피기 위해 고개를 쭉 빼었다.
"지금은 몇월이죠?"
"... 3월."
"3월 말이죠! 세상에나? 그럼 피해자는 일을 시작한 지 6개월이나 된 건가요?"
"아뇨, 10월 말에 시작했으니 만 5개월즘... ... 입니다."
샤워기가 무심코 정정해주다가 혀를 씹었다. 휴대폰은 지적을 당했음에도 웃음을 참기가 어려웠다. 예상외로 재판이 빨리 끝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무죄로.
"존경해 마지않는 재판장님! 증인의 말과 피해자의 작업 기간을 고려해본다면, 당시 사고는 우연으로 발생한 마음 아픈 비극이 아닌 언젠가 발생했을 필연적인 일 아니겠습니까!"
"계속해보시죠."
"따라서 무죄를 주장합니다! 제가 인간의 눈과 귀를 현혹하였지만, 저는 제 일을 했을 뿐, 슬리퍼를 신은 발 아래에 미처 정리되지 않은 칫솔이 있었다는 것은... 안타깝지만 제가 어찌 바꿀 수 없는 것 아닙니까!"
세정제는 휴대폰의 유창한 자기변호를 듣고, 샤워기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이의있습니까?"
"... 없습니다."
휴대폰은 의외의 답변에 휘파람을 불었다. 승리를 확신한 자의 미소를 안면 가득 띄우고서.
"그럼, 판결 내리겠습니다. 피고 휴대폰은..."
그때, 커다란 손이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스크린을 이리저리 두드리더니, 발을 크게 구르며 한탄했다.
"아이씨, 전화는 왜 또 걸었는데?"
짜증섞인 목소리가 욕실에 울리고, 휴대폰에서 무어라 말이 흘러나왔다.
"니가 지금 술 처먹은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헤어졌잖아."
수증기가 없어 깨끗한 욕실 거울에 인간의 모습이 비쳤다.
"어. ... 어, 그래. ... 수작부리지마라, 진짜."
인간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쏘아보았다. 점차 미련이 살아나는 것이 보인 탓이다.
"... 에라이 씨, 집 앞이라고 일찍 말을 했어야지! 야! 거기서 기다려!"
그리고 화장실의 문을 벌컥 열더니, 훌쩍 나가버렸다.
재판장은 허탈한 분위기에 휩싸여서는, 흥이 식은 세정제는 아득하게 높은 변기의 높이에 한숨을 푹 내쉬었고, 칫솔은 제가 무얼 잘못했나 싶어 안절부절 못했다. 유일하게 샤워기가 웃음을 터트렸다. 허무한 결말에 터진 웃음은 누구에게도 전염되지도 못하고 그저 타일에 한번 부딪히고, 울리다가 금세 사라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