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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변의 무코리타, 오기가미 나오코
2021 · 가족/드라마 · 일본
단편 소설을 읽는 느낌이 들었다. 인물들이 실존한다고 느껴지고 나는 그 세계를 잠시 엿본 것 뿐인 기분. 다른 차원에서 이들은 마을을 꾸리고 가족을 만들고 인간을 수용하며 존재한다. 이 영화에서 인물은 이토록 정교하고 촘촘하게 구축된다. 인간이 할 법한 행동과 생각을 하고 나는 그 인간을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을 하지않아도 자연스레 캐릭터를 통해 자체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받아들임은 이해의 차원을 넘는 감각을 제공한다. 그 캐릭터가 인간답게 느껴질 때에서야 이해를 차치하고 우선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세상엔 이런 저런 생각을 가진 인물이 넘쳐나므로. 이해하지 못할 감정과 생각을 애쓰며 이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다.
이런 입장의 독자와 상반되게 캐릭터는 스스로 자신을 이해하는 과정을 거친다. 주인공이 자신을 모멸하고 웃을 자격이 없다 생각하고 무기력하게 지내고 스스로를 학대하는 삶을 살아도 인간을 이해하려는 노력, 자신을 다독이고 싶은 욕구, 사랑해 보고자하는 사소한 꿈틀거림을 방관하지 않는 삶을 결국엔 살려고 한다.
단지 소심하고 사회성이 없을 뿐인 것 같은 인물의 일상을 보여주며 영화는 전개된다. 거리낌도 없고 염치도 없이 자신을 대하는 모습이 조금 불편한 이웃집 사람과 갑자기 죽었다고 연락이 온 남인 아버지, 과한 믿음과 의지를 주는 공장 사장. 꽉 닫힌 생활을 하는 야마다의 삶은 거절과 침묵으로 가득하다. 감각적인 미장센은 현실의 잔혹함과 평화로움을 교차해가며 제시한다. 미적인 화면 구성, 정적인 풍경, 고요한 마을과 대비되게 오징어가 뭉텅이로 통에 담기는 장면, 피웅덩이 속에서 구더기가 꿈틀대는 장면, 죽인 모기를 과도하게 확대하여 보여주는 장면 등 부정할 수 없는 사실과 당면한 현실을 다소 그로테스크하게 비추어 보인다. 이런 특이점들은 잔잔하게 꿀렁이는 전개 속 불쑥 튀어나오는데 이 사소하고 주변적인 특이점들이 영화를 형성하는데 있어서 큰 영향력을 준다고 느꼈다. 일상적 언어와 평온함이 주맥락을 이루는 가운데 삶의 모순점을 드러내는 이러한 연출은 영화의 재미 중 하나이다.
야마다의 심리적 거리감은 영화를 이루는 모든 요소를 통해 감각할 수 있다. 겁이 많고 남들과의 유대를 즐기지 않는 야마다는 다소 멀리에서 카메라를 통해 보여진다. 가끔의 바스트샷을 제외하면 전신샷 혹은 측면, 후면의 비율이 높다. 마음이 허물어졌다고 느낀건 야마다가 먼저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다. 야마다는 그 후 웃기도 짜증내기도하며 변화해간다. 이 마음의 벽을 깨부수는 건 옆집의 시마다상이다. 시마다상은 자신이 가난하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 오히려 과시한다고까지 느껴지며 뻔뻔한 태도를 유지한다. 야마다는 이런 시마다상이 여전히 불편하고 짜증나지만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시덥잖은 이야기를 하고 같이 밥을 먹으며 그의 존재를 삶 안으로 들인다. 특별히 크고 거대한 이유가 없음에도 일상 속 스며듦을 통해 세상의 틈새를 뚫은 것이다. 이 영화의 가장 소중한 부분은 이런 무던함인 것 같다. 죽음의 무게를 결코 무겁게 생각하지 않고 삶 속에 녹여듦으로서 결국엔 *사는 이야기*를 한다.
영화의 인물들은 각자 개인에게 의미있는 인물들의 죽음을 경험한다. 아들, 남편, 아버지, 혹은 오래 보았던 이웃집 할머니. 이들의 추모 방식은 제각각이다. 누구는 이야기하기 벅차 잊혀지길 바라고, 누구는 그 죽음의 실체를 알아보고자 하고, 누구는 그의 뼛조각으로 성적행위를 하기도 한다. 이 모든 것에 정답이 있을까. 사회에서 용인되지 않고 상식적으로 있을 순 없다고 해서 정말 옳지 않은 것일까. 각자의 생각이 있고 각자의 주관이 있듯 각자의 방식도 있는 법이다. 이것이 모든 다양성을 포괄하고 있다고까지 말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이 인물들은 이러한 극복 방식을 택하고 감당하구 있구나 하는.
추모는 결국 살아가는 사람의 위로의식인 것이고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우리의 일부이자 본질로의 회귀, 초석이다.
기존 주민들과 다르게 다소 늦게 연립주택에 들어온 야마다는 작은 세계의 이방인이다. 스스로를 고립시키려하는 것으로 세계와의 타자가 되려 노력한다. 그러나 그 노력이 무색하게 야마다는 금세 융화되었고 융합되었다. 이 장치는 ‘죽음’이다. 오래 전, 죽었다던 옆집의 할머니가 야마다 앞에 나타나 상당히 지극하게 일상적인 인사를 건넨 것이다. 이를 들은 다른 주택 사람들은 ‘그 할머니는 자신이 죽은 것인 줄도 모를 것이다.’ 하며 그리워한다. 이 연립주택의 주민들은 월세도 밀리고 묘를 팔기도 텃밭을 가꾸며 하루하루를 겨우 살아가는 인간들이다. 누구에게 이천만원은 개의 묘비값인데 누구에게 이천만원은 몇달치 집세이기도 하다. 가난과 죽음은 이 영화에서 비슷한 온도로 존재한다. 닥친 현실이고 나를 이루는 구성 요소이고 삶에 영향을 주는 것이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삶과 죽음, 가난과 부, 인간과 외계인, 양분된 존재이지만 결코 배타적인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은 모든 것에게 스며들며 원을 이루고 이 원은 어떻게든 데굴데굴 굴러간다.
영화가 문학적이라고 느껴졌던 이유는 동화 같은 은유 때문이다. 은유가 아니고 단지 맥거핀일 수도 있다. 이 영화의 가장 사랑스러운 점은 주변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중심은 어쩌면 존재하지않고 주변들의 집합이라는 것을 주제를 통해서 인물을 통해서 그리고 영화 전체를 통틀어 내내 설명하고 있단 생각이 들었다. 외계인과의 통신을 시도하는 아이들, 영혼을 금붕어 모양 구름으로 전달하는 상담원, 묘를 판 후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소고기스키야끼 먹기, 불꽃놀이의 추모, 사탕껍질로 만든 조그만 학 같은. 모든 사소함이 동화같은 은유가 된다.
사랑하는 법을 잊은 것처럼 가혹하고 엄격하게 자신을 대하던 주인공이 자신을 비로소 연민하게 됐을 때 나 또한 그 감정에 동조되어 주인공을 연민했다. 불쌍하고 안타까운 동시에 사랑에 관한 미세한 동요를 감각해버린 것이 사랑스럽다가도, 그대로 안쓰럽게 남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억울함을 억누르며 살아가다 단비를 한방울 마셔본 후에야 비집고 튀어나온 눈물, 분노, 원망을 나는 사랑하지 않을 자신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