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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돌림과 학교폭력은 돌이킬 수 없고 피해자에게 상처와 트라우마를 안겨준다.

미안해, 스이카하야시 미키 저/김은희 역 | 다산책방따돌림, 학교폭력은 피해자에게 평생 가슴에 남을 상처와 트라우마를 안겨주고 따돌림도 주홍글씨처럼 남게 된다. 따돌림을 당하지 않으려면 좋은 친구가 한 명쯤은 꼭 있어야 하고 학교폭력과 왕따문제는 피해자들에게 나쁜 기억도 심어주게 만든다. 그리고 사람은 살다 보면 꼭 자신에게 필요한 사람을 만나고 학교폭력과 따돌림은 단순히 장난이 아니고 장난에서 시작된 것이 더 큰 문제를 낳는다. 따돌림은 직장과 교회에서도 발생하고 교회에 다니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다 착한 것이 아니다.따돌림 문제와 학교폭력 문제에 대한 내 생각은 따돌림은 친구에게 어른이 돼서도 나쁜 기억만을 평생 안고 살아가거나 대인기피증을 낳고 평생 가슴에 남을 상처를 안겨주기 때문에 학교와 직장, 교회에서의 따돌림은 멈춰야 한다고 생각하고 학교폭력도 피해자가 학교를 졸업하면 주홍글씨처럼 학교폭력 피해를 안고 살아가기 때문에 학교폭력도 장난과 놀이가 아닌 반드시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따돌림과 학교폭력으로 인해 학교폭력 피해자들과 따돌림을 당한 피해자들은 정신과 약까지 먹으며 고통 속에 살고있지 않은가?미안해, 스이카.라는 책을 통해 사람이 살다 보면 꼭 자신에게 필요한 사람을 만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또 친구가 있어야지만 외롭지 않고 친구에게 내 고민도 털어놓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학교폭력 가해자들과 따돌림을 주동했던 가해자들은 반드시 처벌을 받고 대가를 치뤘으면 좋겠고 학교폭력과 따돌림은 장난과 놀이가 아닌 나쁜 행동이라는 것을 학교폭력 가해자들과 따돌림을 주동했던 가해자들이 꼭 깨닫고 살았으면 좋겠다. 하루빨리 우리나라에서 학교폭력과 따돌림이 없어졌으면 좋겠고 한국도 공부보다는 인성과 배려심, 도덕성을 중요시 여기는 사회로 바뀌길 바란다. 그리고 학교와 가정에서는 아이들이 올바르게 자라기 위해서는 인성교육과 도덕성, 배려심, 이타주의도 필요하고 장애가 있다고 부족한 친구를 함부로 왕따시키거나 학교폭력을 쓰지 말고 존중해줬으면 좋겠다.
글쓴이 오리

우리가 몰랐던 라이온킹의 숨은 뜻

라이온킹(1994)올해 수강하는 과목 중 현대영화라는 교양 수업이 있다. 이 수업에서는 다양한 영화를 보고 그 영화 안애 스며들어 있는 할리우드 또는 미국의 고정관념에 대해 공부하는 수업이다. 처음 수업 때 배운 영화가 라이온킹이라는 영화인데 이 영화는 옛날에도 보고 유명한 영화라 여기 안에 우리가 알아야 할 고정관념이 존재하나? 그냥 동물들 이야기 아닌가 라고 생각하기 쉬웠다. 하지만 라이온 킹의 성우들과 연관 지어 할리우드 영화 안의 고정관념을 찾아보니 생각보다 많은 편견들이 존재했다. 첫번째로는 주인공 심바의 삼촌이자 라이온 킹 안의 악역으로 나오는 스카라는 인물의 성우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 흑인이다. 그리고 종교적 지도자인 라피키라는 캐릭터는 원숭이인데, 한 번씩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하고 바보 같은 행동을 한다. 이 라피키 성우 역시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서 흑인이다. 할리우드의 고정관념 중 하나는 흑인은 백인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문화가 아직까지 남아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것을 가부장적인 지배 문화라고 배웠다. 백인 성우들이 연기한 캐릭터는 무파사,심바,릴라와 같은 착하고 주인공인 캐릭터들이다. 이 영화에서는 남성 중심 문화도 살펴볼 수 있는데 여자 주인공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 않는 데다가, 영화의 이름부터 라이온 킹이다. 왜 라이온 퀸이 아닌 라이온 킹일까? 여기서도 꼭 남자가 왕이 되어야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는 남성 중심 사상이 담겨있다. 또한 악역인 스카는 자신이 왕이 되고 싶어하였는데 다른 등장인물은 그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유는 무파사에 비해 너무 약하다는 이유였다. 스카의 행동은 느리게 걷고 마른 체격이였다. . 그리고 그의 눈은 초록색이였으며 말투는 발음이 새는 말투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을 lisp 라고 하는데 주로 게이들이 그런 말투를 많이 쓰고 할리우드에서 초록색 눈을 가진 캐릭터가 상징하는 것이 게이라고 한다. 처음에 이것을 듣고 눈색과 행동만으로 그렇게 나타내는 건가? 이상한데 라고 생각했었는데 디즈니와 할리우드는 동성애를 받아들이지 못해서 이런 캐릭터들을 만드는 거구나 라고 생각하니까 이해하기가 한층 쉬워졌다. 뿐만 아니라 라이온킹의 배경은 아프리카인데, 아프리카의 자연을 담은 장면들음 많이 나오는데 아프리카 원주민들의 문화와 원주민들은 전혀 나오지 않고 있다. 그리고 라이온킹의 배경음악인 Affrica 는 전부 백인 성우들이 녹음하여 여기서도 백인 우월주의를 나타내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냥 동물들의 이야기를 담았고 무파사가 왕인 아프리카의 한 지역에서 일어나는 일인 줄로만 알았는데, 1시간 조금 넘는 영화에 이렇게 많은 차별과 고정관념이 담겨있을 줄 몰랐다. 이 글을 읽는 사람이 있다면 이 사실을 알고 영화를 다시 보는 것도 추천한다.
글쓴이 책읽는사람

너만을 위한 이야기를 쓰겠다는 것이 아름다운 이유

룩백(2024)분명 처음은 누구나 초라하거나 추하거나 우습다. 그러나 그것을 버티고, 그런 나를 인정하고, 그래서 더더욱 노력하겠다는 마음가짐을 가진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이 영화에서 가장 감동스러웠던 포인트는 그것이다. 두 주인공의 재능은 분명 다른 곳에 존재하면서도 겹쳐지는 부분은 분명히 있어서, 서로를 질투하고 미워하고 결국엔 그것을 회피하고 외면할 수도 있을텐데도 둘은 서로를 아꼈다. 동료이며, 친구이며, 작가와 팬, 독자이자 만화가로써 둘은 서로를 위했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두 여자 만화가는 자신들의 이야기가 인정받게 되고 그것을 평생의 업으로 삼는 것을 택한다. 저런 직업의 선택을 겪어본 적이 없던 나는 그게 참 부러웠다. 자신이 잘하는 것을 좋아하여 그것으로 평생을 살겠다는 마음이 드는 그 행복한 순간. 그 순간에 내 옆에서 나와 함께 할 동료가 분명하게 있다면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웃으며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의견 차이로 서로가 멀어졌지만, 나는 언젠가 둘이 결국엔 경쟁적으로 만날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그러한 일상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비일상적인 이야기를 넣어보는 것이 독자나 시청자에게 반전을 줘서 신선함을 줄 수 있다고는 하지만,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했다. 1시간 정도밖에 안되는 짧은 이야기였지만 나는 그 둘의 인생이 분명히 행복했을 것이라 믿고 싶다. 분명히 나아갈 사람인데도 남겨지는 기분이 드는 것은 왜일까. 그래서 남겨진 사람은 자신을 남겨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쓰게 된다. 잊지 않기 위해서라든가 많은 계기가 있지만 결국은 너만을 위한 이야기였는데, 그것을 다른 사람들이 좋아해준 이유는 그것이 분명히 아름다워서일 것이라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잊고 싶지 않은 사람은 분명 나말고 다른 사람에게도 좋은 사람이었을 것이라서, 이 이야기는 그래서 사랑받은 거라고. 만화라는 매체에 대해서 만화가의 생각이 들어간 신선하고 감동적인 영화였다.
글쓴이 하이데나

류드밀라의 행성을 볼 때 사람들은 무언가 놓고 온 것, 아주 오래되고 아득한 것, 떠나온 것을 떠올렸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김초엽/ 허블/ 2019김초엽 작가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워낙 유명하지만 책에 실린 첫 작품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를 접하고 상상력과 감성이 부족한 나로서는 읽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작가의 "방금 떠나온 세계" 책에 실린 단편 몇 개를 읽고 위로를 받았다. 거기서 그녀는 결핍이 기본값일 수도 있겠다는 상상을 전제로 한다. 결핍은 곧 흠인 이 사회와 다르게 글쓴이의 시선은 신선했고 따듯했다. 어쩌면 과학도라서 새로운 시선으로 소설을 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녀의 책을 읽은 누군가의 말처럼 '이 글을 마음 놓고 읽어도 되겠다.'라고 느꼈고 다시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를 읽게 되었을 때는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읽었다. 감동적이었다. 받은 감동이 추상적이고 나로서는 감히 잡을 수 없는 것들이어서 글쓰기 전에 휘발됐다. 하지만 그와 같은 감동을 다시 느끼고 싶어서 다음 페이지로 넘기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그중에 "공생 가설"과 "관내분실"에 몇 줄 적어보려고 한다. 류드밀라는 어릴 때부터 자신이 떠나왔다는 행성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렸다. 그 행성은 류드밀라의 행성으로 불리며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류드밀라의 행성을 볼 때 사람들은 무언가 놓고 온 것, 아주 오래되고 아득한 것, 떠나온 것을 떠올렸다. 그가 죽고 인류는 오래전 존재했던 류드밀라의 모습을 우주망원경으로 관측했고, 그 소식이 전파를 타고 세계로 전해졌다. 서울의 '뇌의 해석 연구소'에서는 피험자의 생각을 언어 표현으로 옮기거나 반대로 표현된 언어를 역추적하여 원래 피험자의 생각을 추측하는 기술을 연구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기들의 울음이 너무 철학적이었고 지성을 가진 존재와 대화한다는 걸 발견했다. 그들은 감정과 마음, 사랑, 이타심에 관해 토론했다. 그들은 아기들에게 무언가를 가르치려고 하는 것처럼 보였다. 오래전에 류드밀라에서 와서 인류와 공생해 온 이질적인 존재들. 그러다가 일곱 살이 될 무렵에 아기들을 떠나는. 책 속에서는 "우리가 인간성이라고 믿어왔던 것이 실은 외계성이었군요."라는 말이 나온다. 일곱 살 이전에 나도 하늘로 보이는 곳에서 나와 같은 아이들과 놀다가 흰 옷을 입은 누군가에 의해 배를 타고 이 땅에 내려왔다는 기억을 종종 했다. 그래서 "공생 가설"을 읽을 때 더 몰입이 되었고 아기(미숙함)와 성인(성숙함)이 실은 반대일 수 있다는 새로운 시각이 흥미로웠다. 관내분실은 도서관이 마인드 기술을 사용해서 죽은 사람의 영혼을 저장해 놓는 역할을 하게 되는 미래를 배경으로 한다. 과학적인 이야기는 이해 못 했지만 엄마 이야기에서 공감이 되는 부분이 많았고 요즘 내가 생각하는 것과 일치하는 부분이 있었다. "내가 엄마를 처음 본 나이가 다 되어가는데 과연 지금의 나라면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까?" 어쩌면 난 책에 나오듯 류드밀라 행성에서 살다가 엄마를 통해 이 땅에 태어났고 지금 이십 대 중반이 되었다. 나는 지금 관내분실된 고인처럼 세계에서 고립됐고, 완전히 죽지도 못한 채로 어디에도 연결되지 않은 상태다. 하지만 "감정의 물성"에서처럼 이 책을 통해 내 감정을 만지고 쓰다듬는 동안 안정감을 느꼈다. 이야기의 배경이 현실보다 훨씬 더 방대해서 그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도 처음 접하는 것이고 그로 인해 숲 속에 온 것 같은 신선함을 느낄 수 있다. 독서를 하며 지구를 떠나 마치 웜홀을 타고 다른 행성으로 순간이동을 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글쓴이 한국인유학생

땅 함부로 파지 마세요

파묘, 장재현, 쇼박스, 2024유명하기도 하고, 평도 좋았기때문에 파묘는 보기전부터 꽤나 기대를 많이 하고 본 작품이다. 파묘를 다 보고 꽤나 생각할 점이 많은 영화라고 느꼈다. 오컬트 영화는 한 번 보면 더 볼 맘이 안 나는게 많다고 생각했는데 파묘는 적어도 2번은 봐야 봤다고 할 정도로 생각할 점이 많았다.《대중과 마니아층를 동시에 잡자》파묘를 보는 중에도 느꼈지만 정말 하나도 무섭지가 않다. 무서워서 공포영화엔 손도 못 대는 내가 이렇게 느낄 정도면 말 다했다. 또 이야기의 흐름이 한 챕터가 끝나면 다음 챕터가 시작되는 옴니버스식으로 전개가 되어서 중간중간 내용을 끊어주니까 스토리를 외우기 편하였다. 영화의 주제인 파묘도 그리 생소한 주제가 아니기 때문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대강 예측이 가능하였다.그럼 어느 부분이 마니아층을 노렸을까. 파묘는 등장하는 인물이 익숙할지언정 그들이 하는 행동은 꽤나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묘사되어있다. 그 예시로 무당 화림이 굿하는 장면이 있는데 정말 구체적으로 묘사된다. 이런 부분은 마니아층이 좋아할 요소이다. 또 마니아층을 노린게 확실한건 '누레온나', 바로 사람의 얼굴을 한 뱀의 형태의 일본요괴의 등장이다. 이 요괴를 모르는 사람들은 그냥 사람머리를 한 뱀이라며 악귀취급하고 질겁하겠지만, 일본에 관심이 있고 특히 오컬트적 요소에 흥미를 지녔던 사람들은 한국 땅에 일본요괴가 나온 것에 의문점을 갖고, 다음 챕터의 내용을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이다.《역사+오컬트》파묘의 5장, 6장에서는 지금까지의 이야기의 전개와 결이 아예 달라진다. 갑자기 역사적 요소에 깊게 파고드는 것이다. 처음보고 감독이 정말 도전적인 시도를 하였다고 생각하였다. 역사와 오컬트를 섞는 건 종종 봤지만 파묘는 섞는 수준이 아니라 역사를 아예 끌고 나온 수준으로 역사적 요소가 잘 드러난다. 역사적 요소가 강조된 탓에 괴물이 지닌 신비감이 사라져 몰입감이 좀 낮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이러한 시도 자체가 새로웠다고 생각하며 앞으로의 감독의 작품이 기대되었다.파묘는 보는 이에 따라 평이 많이 갈리는 작품이다. 특히 5~6장에서 역사적 요소가 등장하며 지금까지의 전개와는 괴리감이 생기기 때문에 이 부분에서 몰입감이 깨지는가 깨지지않는가에 따라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나는 이러한 시도의 참신함, 등장인물들의 성격과 묘사가 구체적인 부분에 만족스러웠다. 봐서 나쁠건 없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글쓴이 고등어조림

부끄러움의 재발견

보통의 언어들 / 김이나 / 2020.12.17 / 위즈덤하우스보통의 언어들 이란 책을 읽었다. 평소에도 김이나 작사가를 좋아하는 편이라 더욱 관심이 갔다. 보통의 언어들은 '좋아한다, 사랑한다, 실망' 등의 관계의 언어와 '부끄럽다, 찬란하다' 등의 감정의 언어, 마지막으로 '성숙, 꿈, 정체성' 등의 자존감의 언어로 파트를 나누어 하나의 언어씩 깊숙이 의미들을 파고든다. 나는 원래 단어의 숨겨진, 또는 익숙하지만 새롭게 알게되는 의미들을 발견하는 것을 좋아해서 그런지 좋아하는 책이 되버렸다. 가장 기억에 남는 언어는 '부끄럽다'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부끄러움이 많은 아이였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좋기도 하지만 부끄러워서 낯을 가리는 것 같다. 그래서 얼마 전에 나는 왜 이렇게 부끄러움이 많은 걸까? 원인이 뭘까? 하면서 이 감정을 고치려고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책에서는 오히려 부끄러움이 있기 때문에 잘못한 상황이 있을때 뻔뻔하게 구는 게 아니라 반성할 수 있다는 말이 와닿았다. 그래서 부끄러움은 고쳐야할 게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안전감이 들었다. 그리고 부끄러움은 호감 앞에 조심스러운 마음, 굳은살 박이지 않은 양심이 긁히는 마음이라고 풀어주셨는데 공감이 되기도 하고 소중한 감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외에도 개인적으로 와닿는 문장들이 있었다. "사람들에게는 저마다의 감정서랍이 있다. 상황에 대한 기억은 흐릿해질지라도, 그때 느낀 감정들은 어딘가에 저장이 된다."나는 사진 찍는 걸 좋아하는데 지난 사진들을 보면 그때의 감정들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좋았던, 싫었던, 행복했던 간에 향수처럼 감정들이 떠올라서 참 신기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는데 이 글을 읽고 내 감정들이 내 안의 감정서랍에 저장되어있었구나 ! 라고 생각했다. "주는 자가 받는 이를 오랫동안 세심히 지켜봐온 시간이 선을 받는 이의 만족도를 좌지우지하듯, 조언도 그렇다. 듣는 이의 성향과 아픈 곳을 헤아려 가장 고운 말이 되어 나올 때야 '조언'이지, 뱉어야 시원한 말은 조언이 아니다."친구들이 고민을 얘기하면 나는 내가 생각하기에 맞는 말들을 해주고 싶고, 친구의 문제를 해결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종종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좋은 약이라고 생각하고 주었지만 어쩌면 독약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앞으로는 내가 해결해주기보다 묵묵히 들어주고 옆에 있어주는 연습을 해봐야겠다.
글쓴이 도토리누룽지

우리 친구 맞지?

페이스북 심리학 / 수재나 E. 플로레스 저/안진희 역 | 책세상 | 2015년 09월 30일 요즘 같은 시대에 sns를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거의 없을 것이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모두가 쉽고 편리하게 즐길 수 있는 것이 바로 sns이다. sns 중에서도 페이스북은 전 세계적으로 퍼져있는 서비스 중 하나인데 우리는 이런 페이스북을 통해서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자신의 일상을 친구들과 공유한다던가 상업적인 목적으로 마케팅 효과를 불러 일으킬 수도 있다. 또한 자신이 좋아하는 페이지를 저장해놓고 지속적으로 정보를 빠르게 전달받기도 한다. 페이스북은 많은 사람들이 하는 만큼 다양한 새로운 친구를 사귈 수도 있다. 페이스북이 존재하기 전 사람들은 인터넷 상 만남을 제외한 대부분 오프라인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감정을 공유하고 같은 시간을 지내다가 자연스럽게 친구가 되었다. 그러나 요즘은 친구를 만드는 새로운 방법이 생겼다. 바로 페이스북 친구추가 기능이다. 이 기능을 통해서 모르는 사람들과도 친구가 될 수 있다. 한 쪽에서 보낸 친구요청을 받아주면 바로 친구가 되는 것이다. 친구가 된 후에는 서로의 게시물을 보며 오늘은 무엇을 했는지 어떤 고민이 있는지 서로에 대해 더 알아갈 수 있고 오프라인 친구와 비슷한 사이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페이스북에서 사귄 친구가 오프라인 친구처럼 서로의 감정과 기억들은 공유한다고 해서 진짜 친구가 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페이스북을 통해서 친구가 되면 서로 메신저도 주고받을 수 있고 게시물도 서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오프라인 친구와 큰 차이가 없어진다. 그러나 실제 오프라인 친구만큼의 애착감을 가지지는 않는다. 아무리 친구라고 해봤자 온라인 속에서일 뿐이고 온라인에서 벗어나는 순간 친구라는 생각도 별로 듣지 않는다. 실제 오프라인 친구들이 온라인에서도 친구가 되는 경우가 다반사이며 온라인에서의 기억 뿐 아니라 오프라인에서 훨씬 더 다양한 기억들을 공유하기 때문에 그에 따른 애착감은 온라인 친구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다. 특히 10대일 경우에는 온라인 친구와 아무리 친하더라도 하루의 절반 이상을 함께 지내는 오프라인 친구들과의 우정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또한 오프라인 친구들은 싸우고 다퉈도 다시 화해하고 계속해서 우정을 지속할 수 있는 반면에 온라인 친구들은 다투게 되면 손쉽게 친구관계를 끊어버리고 차단할 수 있기 때문에 우정의 깊이 또한 같다고 보기 힘들다. 실제 주변 친구들의 페이스북의 친구 수를 보면 대부분 200명에서 300명 사이이고 많게는 500명 이상인 친구들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200명이나 넘는 숫자의 친구가 다 오프라인에서도 친구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친구들에게 물어보면 잘은 모르지만 실제로 한두 번 만나본 사람 또는 모르는 사람인데 친구요청이 와서 그냥 받아준 경우도 있다. 이렇게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온라인상에는 쉽게 친구가 된다. 나 또한 250명 정도의 페이스북친구가 있지만 실제로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은 50명 정도도 안된다. 처음에는 친구요청이 와서 받아주고 그 이후로 몇 일 동안은 서로 연락도 주고 받은 적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 지속되지 않는다. 서로 실제로 같은 경험이 없는 상태에서 연락을 계속해서 주고받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다 보면 연락 또한 서서히 줄어들고 어느새 끊기게 된다. 그래서 그 이후로 나는 친구 요청이 왔다고 하더라도 아무거나 받지 않고 실제로도 친하게 지내는 사람의 요청만 받게 되었다. 페이스북을 통해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친구를 사귀는 것은 절대 나쁜 일이 아니다. 그러나 페이스북을 통해 사귄 친구들이 오프라인 친구들만큼이나 진정성있는 친구인지는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온라인 상에서 아무리 친하게 지낸다고 하더라도 오프라인에서 만난친구들 만큼 친하게 지낼 수도 없을뿐더러 애착도 가지 않는다. 오프라인 친구들은 서로 배려해주며 차이를 좁혀가는데 온라인 친구들은 차이가 있으면 연락을 끊어 버리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라인상 친구도 친구일 수는 있으나 오프라인의 친구만큼 돈독한 사이가 될 수 없으니 온라인 친구보다는 오프라인 친구에 집중하는 태도를 지녀야 할 것이다.
글쓴이 피터팬의그림일기

가을, 18-22도

나는 사계절 중에 가을을 제일 좋아한다. 늘 가을이 오길 기다리고 설레여했다. 가을은 왠지 차분하고, 정적이고, 고요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나의 이미지랑 비슷한 면이 있어서 더 마음이 가는지도 모르겠다. 가을하면 생각나는 이미지들이 몇가지 더 있다. 따스한 햇살을 받아서 금빛깔을 내는 영롱한 나뭇잎들, 길바닥에 떨어진 나뭇잎을 밟을 때나는 바스락 바스락 경쾌한 소리,커다란 나무 아래에 밴치에 앉아서 책을 읽는 백발의 노인의 모습도 떠오른다. 내가 애정하는 이 가을이 오기까지의 여정은 꽤나 길다. 화려한 꽃들 덕분인지 꽃샘추위가 있는 봄과 신나는 여름방학이 있긴 하지만 아이스크림 녹듯이 뜨거운 여름을 지나 마침내 가을이 찾아온다. 약 8개월이라는 시간들을 묵묵히 기다린 보상이라도 해주는 듯이 가을의 날씨는 내가 딱 좋아하는 온도, 18-22도 정도에 머문다. 이 온도는 기분이 좋아지게 만드는 마법이 있는 것만 같다. 너무 덥지도 너무 춥지도 않은 선선한 온도.. 미소짓게 만드는 온도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가을의 또 다른 마법은 시간여행을 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일 년 전에 느꼈던 딱 그 온도, 공기, 바람을 만날 때면 자연스럽게 나를 일 년전 혹은 몇 년 전의 가을로 날 데려간다. 가을의 산들거리는 날씨 덕에 차곡차곡 쌓인 추억들이 많은 탓이겠지? 제 기억 속의 가을은 여기까지 입니다. 당신에게 가을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나요?
글쓴이 도토리누룽지

검은 불빛, 검은 날개, 검은 혁명자의 탄생

헝거 게임 시리즈 / 게리 로스 & 프랜시스 로런스 감독 / 수잔 콜린스 원작 / 2012~2015 역사를 돌아보면 신기하게도 민주주의와 독재 체제가 반복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세상은 권력구조가 필수적인 인구 수를 갖고 있기에 권력자가 등장하여 권력을 휘두르다가 대중의 혁명에 휩쓸려 사라지는 반복을 이룬다. 헝거 게임의 배경, 판엠 제국 또한 단 한명의 대통령을 두고 12개의 구역에서 권력을 행사하는 사회를 갖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주인공인 캣니스 에버딘은 가장 끝 구역에 해당하는 12구역에서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여동생을 끔찍이 사랑하는 장녀였다. 마을은 광산에서 석탄을 채취하는 것을 주목적으로 만들어져 대부분의 사람들이 탄광 작업으로 인해 검은 얼룩을 갖고 살아간다. 그런 마을에서 캣니스는 활로 사냥을 다니며 집의 허기를 조금이라도 덜고자 노력하는 평범한 소녀였다. 그러나 자신의 동생, 프림이 헝거 게임에 참가할 나이가 되고 단 한 표밖에 없던 프림이 뽑히자, 캣니스는 단번에 자신이 자원하겠다며 나선다. 자신의 동생을 위해 자원한 최초의 조공인인 캣니스에 시선이 몰리고, 캣니스는 난생 처음 받는 관심에 부담스러워 하다가 자신에게 무관심한 스폰서들에게 화가 나 그들에게로 화살을 날린 후 ‘관심 감사합니다.’라며, 한방 먹이기까지 한다. 솔직히 그 성격을 가지고 어쩔 땐 불안해보이고 소심한 모습을 보니 캣니스가 사춘기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쫀 것치고는 너 입 잘 털었어.)어쨌든 그녀는 헝거게임 우승 후, 수많은 사람들의 열광을 받고 스노우 대통령(대통령이라고 해도 괜찮은 건가? 독재자라고 해야되지 않나?)에게서 감시를 받으며 살게 된다. 하지만 사람들의 열광이 곧 혁명의 불씨가 될까 두려워한 스노우가 그녀에게 경고를 하자, 캣니스는 결국 캐피톨이 준대로 대본을 읽기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층 구역이 계속해서 반항하자, 스노우는 새로운 룰의 헝거게임을 주최하여 그녀를 죽여버리기로 한다. 이러한 전개를 보면 우리 사회에서 정치적인 이슈가 나타날 때마다 사람들의 눈을 돌리기 위해 소위 말하는 찌라시를 풀기도 한다는 게 생각난다. ‘냄비 근성’이라는 말이 요즘의 현대인의 미디어 소비 행태를 제대로 표현한 것처럼 사람들은 어떠한 자극적인 요소에 한번 크게 열광하고 식어버린다. 뜨겁게 달궈지다가 팍 식어버리는 행태를 스노우 또한 원했으나 그녀의 인기가 식지 않으니 결국 그녀를 죽여버리기로 한 것이다.새로운 룰이 대체 무엇인가 하니, 역대 우승자들 중에서 뽑기를 하여 그들로 하여금 헝거게임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기존의 우승자들은 미치고 팔짝 뛸 것이었지만, 스노우는 강행했다. 모든 사람들이 경악하던 헝거게임이 시작하고 캣니스는 이번엔 피타뿐만 아니라 같이 동료가 될 다른 구역의 참가자들과 관계를 만들어간다. 그러나 각 우승자들은 저번 헝거게임에서처럼 우승자 후보라고 곽광받던 사람처럼 미친 살인병기와 같은 사람들이 아니었다. 여기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살인병기니, 주력 후보니, 하는 것들이 오히려 그 사람을 죽여버렸겠구나 하는 생각이 말이다. 그러니 더 많은 견제와 경계를 받았을 것이고, 생존률은 그에 따라 줄어들었을 것이다. 그러니 역대 우승자들은 오히려 캣니스와 피타같이 비호전적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연기와 같이 교활하게도 행동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고, 그것은 스노우 대통령에게 참 안좋은 사실이었다.캣니스가 결국은 새로운 헝거게임조차도 완전히 박살내면서 동시에 게임 메이커였던 플루타르크의 비밀 계획도 성공하였다. 스노우는 캣니스를 죽이는 것도, 그리하여 이 제국의 전복을 꿈꾸는 희망을 짓밟는 것도 실패한 것이다. 그리고 그 실패는 13구역의 반란군에겐 아주 작더라도 밝은 불씨가 되어주었다. 마지막, 이제 정말 마지막 한 발짝만 남은 채 캣니스는 자신의 적이 누군지, 그리하여 무엇을 해야하는지 알 수 없었다. 12구역은 그녀가 헝거게임에서 구출되자마자 그 즉시 폭격을 당해서 약 1만여 명의 주민들이 몰살당했다. 그리고 캣니스는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들과 함께 13구역에 머물다가 그 모든 현실을 마주하고 결국 자신이 모킹제이, 앞서서 사람들을 이끌 혁명자, 잔다르크가 되기로 결정한다.캣니스의 결정이 과연 옳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이 세상을 바꾸는 데 아주 큰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것은 확실했다. 그녀는 자신의 영향력을 미디어로 과시하여 스노우를 압박하고, 사람들을 모은다. 실제로 무슨 일이 있는지 다른 구역에게 알리기 위해 선전 영상을 찍는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답게 미디어가 항상 옆에 붙어있는데, 그 영향력을 보여주는 장면이 가히 장관이었다. 그녀가 말했던 강렬한 한 문장이 반란에 가담한 사람들의 구호가 되고, 그녀가 즉석으로 불렀던 노래 한 소절이 그들의 군가가 되었다. 그걸 보며 미디어의 영향력과 그에 따른 결과 즉, 인과관계가 우리 현실에도 쉽게 찾아낼 수 있기에 이 영화를 보는 모든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준다는 생각을 했다. 이 영화의 큰 줄거리는 혁명과 성장이겠지만 뻗어나가는 가지로는 수많은 교훈과 주제가 있을 것이다.헝거 게임을 통해 판엠 제국과 같은 독재 정치를 하는 국가들에게도 그리고 그들을 묵인하거나 무시하는 세계인들이 수많은 생각을 토해내며 논쟁을 하게 되었다. 혁명 혹은 반란은 독재와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다. 언제까지 절대적인 군주는 없다. 그러나 영원한 평화도 없다. 그리하여 우리는 계속해서 역사를 반복한다. 그 반복이 끝날 때, 우리의 인류가 과연 어떤 모습일지는 과거의 역사를 답습할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다. 어떠한 굶주림을 갖고 있을지, 그래서 어떤 목적을 갖고 이 세상의 변화에 뛰어들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글쓴이 하이데나

괜찮아, 세상은 정말 넓어

소년시절의 너2019년 ‧ 로맨스/범죄 ‧ 2시간 15분감독: 중국상주연: 주동우, 이양천새<소년시절의 너> 영화를 봤다. 2020년에 보고 4년만에 다시 보게되었다.4년 전 인생영화라고 말했을 정도로 기억에 남는 영화였는데 재개봉하게 되어서 다시 보게 되었다. 두번째로 보니까 처음엔 안보였던 것들이 더 눈에 들어왔다. 섬세하고 감각적인 연출, 배우들의 섬세한 연기, 다시 들어도 너무 좋았던 OST, 영화에서 시사하고자하는 메세지들이 더 잘 느껴졌다. 전반적인 줄거리는 중국의 한 고등학교에서 왕때를 당하게 되는 여고생 '첸니엔'과 그런 첸니엔을 지켜주는 '베이'의 풋풋하지만 절절한 사랑이야기이다. 실제로 중국에서 일어났던 왕따 사건과 대학입시에 대한 이야기도 함께 나온다.영화에서 초점을 둔 학교폭력,입시에 대해서 더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영화를 보면서 이런 학교폭력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화가나고 너무 안타까웠다. 영화 속에서 학교폭력을 당했을 때 솔직하게 털어놓고 이야기할 어른들이 없다는 사실이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더욱 학교에서 학생들을 믿어주고 안아줄 수 있는 선생님 또는 체계적인 프로그램들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중국의 입시의 모습이 한국의 수능과 매우 유사해보여서 더욱 공감이 됐다.아직 어린 아이들에게 대학입시가 전부라고 이야기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속상했다. 왜냐면 나도 중고등학교때 대학이 전부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왔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학생이 되고 세상을 조금씩 알고보니, 세상은 넓고 그저 내가 원하는 삶을 살면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고등학교 시절의 나를 만난다면 말해주고 싶다."괜찮다고 그저 네가 좋아하는 걸 하면 된다고"
글쓴이 도토리누룽지

책임을 지는 만큼 강한 힘이 생긴다.

마담 웹2024 | 1시간 57분 | 액션주연: 다코타 존슨, 시드니 스위니, 이사벨라 메르세드마담 웹 이라는 영화는 2024년 개봉했으며 SF/액션 장르이다. 1시간 56분이라는 러닝타임을 가지고 있지만, 개인적으로 영화를 매우 재밌게 봤기 때문에 러닝타임이 길게 느껴지진 않았다.영화는 구급대원인 주인공이 바삐 운전하는 장면에서부터 복선을 깔아 놓는다. 스케이트 보드를 타다가 주인공이 모는 차에 거의 치일 뻔한 학생이 이후 조력자가 되거나, 응급실로 보낸 환자의 가족 중 한 명이 다시 출연하거나.영화를 접하기 전, 추천하는 글에서는 다른 스릴러 영화를 언급하며 그 영화보다 더 짜릿했다고 추천했기에, 장르를 착각해 시청했지만 후회나 실망은 하지 않았다. 도리어 주먹을 쥐고 집중해가며 영화를 시청하게 되었다. 주인공의 능력은 미래를 예견하는 능력인데, 힘을 각성하는 장면에서 보여주는 수중촬영 특유의 아름다운 조명도 보기 좋았고, 메인빌런에게 붙잡히거나 살해당하는 미래를 바꾸기 위해 몇번 같은 상황을 반복하는 장면 연출은 루프물같았다. 루프물에 있어 매력적인 점은, 루프를 인식하고 있는 인물을 제외한 모든 것이 매 장면 반복되면서도 루프를 인식한 인물이 달리 행동하거나 타이밍을 조절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다른 상황과 흐름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주인공과 같이 원하는 결과를 만들기 위해 루프하는 캐릭터에게는 신뢰가 상당히 중요하다. 상대가 나의 말을 믿고 갑자기 엎드리거나, 멈추거나, 달려야 다른 결말이 나온다. 그런 의미에서 마담 웹은 흥미로웠지만 감정선을 따라가긴 어려운 면이 있었다. 주연 캐릭터들은 주인공이 해외로 가 정보와 각성하는 과정을 거치기 직전까지 만난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은 사이기 때문이다.제아무리 벽과 천장을 기어다니면서 남들에게는 안 보이는 괴한에게서 목숨을 구해줬다한들, 처음 보는 낯선 사람을 무턱대고 믿기는 어렵다. 주인공 역시 주연 인물을 구출하는 과정에서 택시를 절도하거나 납치범으로 몰리는 등 불리한 상황이 되어서까지 생판 모르는 여자애 셋을 최우선으로 구해야하는 의무가 없다. 구급대원으로 일하기 때문일까, 이 부분은 보면서도 이해가 조금 어려웠다. 그런 여유가 없고 급변하는 상황에 당혹스러워하는 모습은 강압적인 태도로 주연캐릭터들을 나무라는 모습에서 선명히 보인다. 왜 이렇게까지? 라는 생각이 영화를 보는 내내 들었다. 물론 해외 영화이니만큼 경범죄에 대한 감각이 한국인인 나와 다름을 인지하고 있어도, 역시 택시를 절도하거나, 미성년자 소녀 셋을 숲에서 대기하라며 먼저 가버리거나, 절도한 차량의 번호판을 제거하는... 그런 모습을 볼때마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는가 싶었다.물론 생면부지의 타인이라도 어떤 남자에게 살해당하는 미래를 본다면 바꾸고 싶긴 하겠지만, 일반적으로 사람은 본인의 인생이 있지 않겠는가... 더불어 생면부지의 타인이다. 상황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도 없이 타인의 행보를 강제하는 것은 그리 좋은 판단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아니, 애초에 보통은 안그러지 않는가? 남이 내 말을 듣겠는가는 둘째쳐도, 생면부지의 타인에게 제 커리어와 빨간줄 하나 없는 이력을 걸 정도로 헌신적인 인간상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이런 판단 등은 태반이 갑작스러운 상황(미래를 반복하는 능력이 생기거나, 메인빌런이 목숨을 노리며 저지르는 극단적인 공격들)에 정상적인 판단이 어려웠다고 생각하기로 했다.감정선이나 스토리는 그리 특출나지 않은 히어로 영화다. 능력 설정도 신선한 것이 없었다. 다만 이 영화를 보며 땀을 쥐게 되는 모습은 주인공이 능력을 사용하며 반복되는 루프 연출이었다. 데자뷰를 겪어본 기억은 없지만, 아마 굉장히 심한 증상은 이런 모습이 아닐까 싶었다. 결국 루프물과 같은 장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주인공이 점차 능숙하게 능력을 사용하는 모습에 즐거움을 느끼면서 영화를 시청할 수 있겠지만, 감정선이 더 중요하거나 루프물과 같이 비현실적 요소에 대한 연출이 불호인 사람에게는 추천하기 어렵다.개인적으로 영화 내 대사 중에 두가지가 인상 깊다. 첫번째는 주인공이 해외로 가서 제게 힘을 준 존재에게 힘을 각성하며 듣게 되는 대사다. 책임을 지면 큰 힘이 따라온다는 식의 대사였는데, 스파이더맨에서도 등장했던 명언을 약간 변형했다. 전후 관계를 바꾸는 것이 마음에 들어서 인상깊었는데, 주연캐릭터들을 살리고 메인빌런을 제 손으로 저지하겠다는 각오를 얻은 뒤에 각성한 주인공에게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앞뒤가 바뀐게 신선하게 다가오기도 했다. 두번째는 주인공이 피날레 장면에서 메인빌런에게 하는 대사인데, 내내 성장한 주연캐릭터들에 의해 살해당하는 미래를 바꾸려고 발악한 메인 빌런에게 네 미래에는 자신이 있다고 말하는 모습이 통쾌해서 인상깊었다.슈퍼히어로는 그리 좋아하는 장르가 아니지만 재밌었다.
글쓴이 닉네임이 왜 있어요?

아름다움에서 추악함으로 떨어지는 '그것'에 대하여

프랑켄슈타인 / 메리 셸리 저 / 김선형 옮김 / 문학동네 / 2012너무도 익숙한 괴물하면 떠올리는 이미지 중 하나는 각진 얼굴에, 짧은 머리, 초록색 피부에, 나사가 박혀있고, 이리저리 기워진 얼굴이다. 그러나 이 원작소설인 책을 읽기 시작하면 그 얼굴은 흐릿하게 변하고, 우리는 새로운 괴물을 이리저리 뭉쳐보면서 창조해야 한다. 가장 혐오감이 드는 얼굴로 말이다. 그래야 프랑켄슈타인의 심정을 알 것 이고, 괴물의 자기연민에 대해서도 이해가 갈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항상 자신과 다른 것을 두려워하고 혐오한다. 그러나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의 가정에 퍼져있던 특유의 관용심과 부드러움을 장착한 신사로서 자신의 지식을 이용해 새로운 창조물을 만들겠다는 야심이 넘치는 청년이었다. 어떤 것이든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그는 자신의 창조물이 정말로 생명을 얻어 숨을 내뱉은 그 순간부터 혐오감에 몸부림치며 도망간다. 사실 이해는 되지 않았다. 야망에 불타올라 많은 시신의 감촉엔 신경도 쓰지 않았으면서 이제서야 그 과정을 거쳐서 이제 막 눈을 뜬 그 창조물에게 너무 한 처사라고 생각되었다. 이것이 아마도 괴물이 그토록 원하던 동정심 내지는 애정일 것이다. 하지만 프랑켄슈타인도, 그리고 그의 이야기를 주의깊게 들었던 월턴도 차마 괴물의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괴물 그 자신도 자신의 모습이 너무도 추하다고 했다. 작가인 메리 셸리 마저도 이 작품을 자신의 추악한 자식이라고 칭했다. 결국 그 괴물은 누구에게도, 그리고 그 자신에게도 애정을 한 줌 받지 못하고 세상을 뜬다. 그런 모습을 월턴보다도 더 멀리서 지켜보는 우리는 인간의 본성과 그리고 후에 갖게 되는 감정에 대한 반성을 하게 된다. 얼굴은 아무리 추악하더라도 인성의 추악함보다 덜 하지 않는다. 얼굴의 추악함에서 후에는 자신의 본성에 대한 추악함마저 범죄로 나타낸 괴물이 다른 미래를 갖게 되었다면 어떨지 책장을 넘기는 내내 안타깝게 상상해보았다. 프랑켄슈타인이 조금 더 단단한 사람이었다면, 그의 곁에 그를 지지할 친구가 처음부터 존재하여 그의 야망을 말리거나 조금이나마 부드럽게 받아주었다면, 그리하여 괴물이 처음부터 자신의 추악함에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새로운 가족, 친우에 기쁨을 먼저 느꼈다면. 지나간 과거를 흘러보내는 것이 고통스러운 것은 괴물도, 프랑켄슈타인도 똑같을 것이다.
글쓴이 하이데나

당신의 여행

지구에서 한아뿐 [ 양장, 개정판 ]정세랑 저 | 난다 | 2019년 07월 31일"한아하고 함께 있고 싶다는 마음, 상징하는 거 맞죠?""죽음이 갈라놓을 때가지.""죽음 후에도요. 한아가 아니면 지구에 있을 의미가 없어요.""어떤 특별한 사람은 행성 하나보다 더 큰 의미를 가질 때가 있어요. 그걸 이해하는 사람이 있고 못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저한텐 엄청 분명한 문제예요.""너를 위한, 너에게만 맞춘 감각 변환기를 마련하는 데 긴 시간이 들었어""네가 내 여행이잖아. 잊지마"내가 지구에서 한아뿐에서 가장 좋아하는 대사는 '너를 위한, 너에게만 맞춘 감각 변환기를 마련하는 데 긴 시간이 들었어' 라는 문장인데, 앞 뒤를 보면 더 좋아지는 문장이다.이 문장의 앞에는 '나는 탄소 대사를 하지 않는데도 네가 내뿜는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싶었어. 촉각이 거의 퇴화했는데도 얼굴과 목을 만져보고 싶었어. 들을 수 있는 음역이 아예 다른데도 목소리가 듣고싶었어 ...' 라고 말한다. 경민이 한아를 위해 하는 말들이 정말 한아를 사랑한다고 모든 문장에서 말해주고 있는데 특히 저 문장이 나에게는 한아를 향한 경민의 사랑이 가장 잘 느껴졌다.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것을 바꾸고 그 사람이 하는 것을 하고싶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말 풋풋한 사랑인 거 같다. 연애의 설레이는 감정을 느끼고 싶을 때 읽으면 당장이라도 평소 좋아했던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싶어지는 위험한 책이다...
글쓴이 책읽는사람

우리 사회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것들

현남 오빠에게조남주, 최은영, 김이설, 최정화, 손보미 저 외 2명 | 다산책방 | 2017년 11월 15일대학에서 만난 현남 오빠와 10년째 연인 관계인 ‘나’는 단골 카페에서 현남오빠에게 이별 편지를 쓴다.무뚝뚝하게 배려해 주는것,집을 같이 보러다녀주는 것, 공무원 준비를 도와주는 것 같이 옆에서 큰 힘이 되어주는 현남오빠는 주인공인 ‘나’를 자신의 소유물로 생각하며 행동한다. 남성우월주의를 인간화하면 만들어지는 사람이 현남오빠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을 같이 보러다니고 이사를 도와주며, 진로 같은 미래까지 알려주고 이끌어주는 현남오빠가 사귀는 당시에는 그런 모습이 매력적이고, 어른스럽다고 생각이 들어 동경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연애가 끝이 보이는 상황이 되면 그런 모습들이 나를 구속하는 것인가? 하고 생각이 들 것 같았다.그리고 인상 깊었던 부분은 “오빠는 저를 데리고 가겠다고 했어요. 동문회에 입고 갈 단정한 정장을 사주었고 당일 메이크업을 받을 숍도 예약해놓았어요. 제게 주는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고맙기도 하고 인정받는 기분이 들기도 했는데 사실 마냥 기쁘지는 않더라고요,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데 잇새에 아주 작은 고깃덩이가 끼어서 아무래도 빠지지 않는 답답함,찜찜함,불편함, 뭐 그런감정 이라고 이야기 하는 부분에서 나라면 이때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에 대해 생각해보았는데 나라면 별로 불편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현남오빠가 사준 정장을 입고 메이크업 샵에가서 메이크업을 받고 동문회에 다녀올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부부동반 모임이나, 남자친구의 동문회 같은 불편함이 어느정도 요구되는 자리에 가보지않아서 그런건가? 하는 생각도 잠깐 들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주인공인 ‘나’의 불편함 감정을 이해하지 못했다.그런 순간 바로 밑 친구 지은이가 이야기하는 “자기 동문횐데 왜 너한테 새 옷을 입히고 화장을 시키지? 네가 현남 오빠 악세사리야?” 라는 말을 보고 내가 누군가의 악세사리가 되는 일을 너무 많이 겪고 그 일을 자처하기도 했었던 것인가? 라는 생각도 하게되었다. 또한 요즘세대의 커플이나 예비 부부에게는 많은 이야기 거리인 아이 문제에 대한 언급도 인상 깊었다. “오빠도 아이를 셋은 낳을 거라고” 이렇게 이야기하는 현남 오빠는 ‘나’의 의견은 들어보지도 않고 물어보지도 않은 채로 그렇게 이야기했다.이것을 보고 소설 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이런 경우는 많고 임신과 출산은 여성의 몸으로 하는 것이고 그렇기에 남성은 하지 못한다. 그리고 임신과 출산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라 아이를 가질때의 고통과 출산을 하면서 겪는 고통, 자연분만이든 제왕절개든 다양한 방법으로 아이를 낳을 수 있지만 그에 따른 고통 또한 모두 여성의 몫인데 그것을 마음대로 재단하는 남성의 태도가 ‘현남오빠’에게 그대로 나타난 것 같았다. 주인공 ‘나’가 현남오빠와 헤어져야겠다고 생각한 계기는 책에서 말한 것처럼 주인공 ‘나’에게는 엄청나게 중요하고 큰 일인데 그것을 나(현남오빠)는 이미 결정했으니 너는 따라오면돼 라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을 것 같았다. 자신의 인생에 진로도 가정을 꾸리는 일도 중요한데 그것을 오빠의 결정에 따라 휩쓸리는 것들이 많아 질 수록 이 연애의 마지막을 생각한 것 같다.분명 대학생활을 하고 회사에 들어가 일을 하다보면 나에게도 생길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을 한다. 이제는 전혀 남 일도 아니고, 먼 미래도 아니기에 누군가가 나의 결정을 존중해주지 않고 자신의 주장만 강요하는 사람이 생겼을 때 똑바로 나의 의견을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의 글을 다 읽으면 왜 이 글의 제목이 우리 사회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것들인지 알게 될 것이다. 얼마전 sns에 올라온 글을 보고 정말 놀랐다. 헤어진 여자친구를 폭력으로 복수하고, 그를 넘어서 폭행하고 여자친구를 죽이기까지하는 세상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우리 사회의 심각성을 알아야할 것 같다. 이 글이 작지만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글쓴이 책읽는사람

새의 노랫소리가 그리워지는 봄

침묵의 봄레이첼 카슨 저/김은령 역/홍욱희 감수 | 에코리브르 | 2011년 12월 30일 봄은 새로운 생명력이 꽃 피워지는 시기를 상징하는 계절 중 하나이다. 그러나 이 책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봄의 이미지와 달리 ‘침묵의 봄’이라는 제목으로 조금은 역설적인 저자의 생각을 암시하고 있는 듯 보인다. 이것이 내가 이 책을 읽고 싶다고 선택하게 된 계기이자 궁금증을 해소하고자 책장을 넘기게 된 첫 시작이었다. 책의 주 핵심소재인 ‘살충제’를 처음 접하게 되었을 때 그것이 위험하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꼭 필요한 화학물질이라고 생각했었다. 인간에게 어떠한 해를 입히지 않더라도 일반적으로는 벌레를 싫어하는 것이 사람의 특징이다. 나 역시 벌레라고 하면 무서운 생명체이고 외관이 징그럽게 생겨 꺼려졌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방해만 된다고 생각해 왔다. 대개 벌레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가장 첫 번째로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벌레를 없앨 수만 있다면 적어도 인간에게는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특히 농업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살충제가 필수이기 때문에 여러모로 인간에게 질 높은 삶을 제공한 수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살충제에 대해 지식이 없었을 때의 이야기일 뿐이다. 「침묵의 봄」에서는 “그저 한두 종의 식물이나 동물을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계의 균형을 유지하고 생명체의 특성, 생명체와 환경의 상관관계에 대해 기본 지식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아마 이 문장만으로도 이 책을 설명할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여지껏 정부에서도 생태계에 존재하는 소수의 종을 억제하기 위해 살충제를 살포했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한 사례로 네덜란드 느릅나무병을 예시로 들 수 있다. 느릅나무 껍질에 사는 딱정벌레가 병을 옮기고 다니자 뉴잉글랜드 지역에서는 딱정벌레를 없애기 위해 살충제를 살포하기 시작했다. 네덜란드 느릅나무병의 방제는 1954년 대학 구내에서 소규모로 시작되었지만 다음해에는 살충제의 살포 범위가 확대되어 각종 화학약품들이 퍼붓듯 땅에 뿌려졌다고 한다. 적은 양의 살포가 이루어졌던 1954년에는 큰 문제가 없어 보였지만 문제는 다음해 봄이었다. 살충제가 살포된 줄도 모른 채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온 수많은 울새들이 그야말로 떼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살충제를 뿌린 이들은 하나같이 새에게 무해하다고 강조했지만 약품의 독성으로 인해 많은 새들이 심한 경련을 떨며 처참히 죽게 된 것이다. 새들은 살충제가 뿌려진 지역에 발을 디뎠을 뿐인데 과연 무엇이 문제였을까? 문제는 울새들이 살충제와 직접적으로 접촉한 것이 아니라 지렁이들을 먹으면서 간접적으로 중독되었다는 것이다. 생태계는 다양한 먹이사슬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단순히 하나의 종만을 박멸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나의 종을 박멸시키고자 한다면 반드시 다른 종들도 이러한 비극을 같이 겪게 되어 결국 자연은 인간에 의해 파괴되고 말 것이다. 그런데 책을 읽다 의문이 생겼다. 살포한 살충제의 양이 소량이었다면 살충제의 양에 비례하게 생물들이 죽는 것이 맞지 않나? 나의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은 화학약품 중 일부인 DDT와 DDD였다. DDT는 지방화가 되었을 때 생물학적으로 증폭되기 때문에 실제 자연에 살포된 양이 극소량이라고 해도 인체 내에서는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DDD는 자연적인 먹이사슬을 통해 폭발적으로 독소가 축적되어 결국 먹이사슬의 최고점에 있는 인간이 DDD를 섭취하게 되면 죽음에 이르는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이를 통해 살충제의 양이 극소량이라고 해서 인간이 이것으로부터 안전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도 마찬가지이며 순간의 편리함을 위해 투여한 살충제가 끝내 부메랑이 되어 인간에게 끔찍한 무기가 되어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살충제와 같은 화학 약품을 가지고 있는 먹이사슬의 정점에 있는 인간일수록 경각심을 느끼고 행동에 주의해야 자연을 파괴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책을 읽으며 많이 분노했던 점은 살충제 없이도 해충을 충분히 막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선충 때문에 장미가 병에 걸렸지만 화학살충제 없이도 장미나무를 살릴 수 있었던 방법이 존재했다. 선충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장미나무 옆에 메리골드를 심는 것이다. 메리골드의 뿌리에서는 토양 속의 선충류를 죽이는 물질이 자연적으로 분비되기 때문에 장미는 살충제 없이도 건강해질 수 있었던 것이 대표적 사례이다. 과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자연 보존의 필요성을 간과하지 않았기 때문에 장미나무를 지킬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장미나무를 병들게 했던 선충을 없애기 위해 무조건 살충제를 뿌리기 보다는 식물들 간에 어떤 상호작용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먼저 알아야 할 것 같다. 생태계에 존재하는 생명체가 다양하듯 벌어진 문제를 해결하는 해결책 역시 다양할 것이다. 모든 문제에 살충제를 도입한다면 정부 입장에서는 편한 방법이었지만 생태계에 스며든 살충제는 생물들을 지속적으로 죽이는 수단이 될 뿐이다. 책의 소제목 중 유독 눈에 띄었던 ‘자연의 반격’은 정말 흥미로웠다. 「침묵의 봄」에서는 자연을 일정한 틀에 맞추려 온갖 위험을 무릅쓰다 결국 목적에 달성하지 못하는 인간의 상황을 풍자하고 있었다. 인류는 수없이 자연에 대항해 왔고 자신들이 정한 규격에 맞추고 싶어했지만 빈번히 실패하고 말았는데 이것을 정확히 짚어낸 것이다. 오늘날 곤충방제 프로그램의 핵심은 자연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하는데 처음엔 너무 자연중심적인 발언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러나 자연은 인간이 원하는 대로 쉽게 바뀌지 않았고 살충제의 살포는 오히려 더 많은 종의 해충을 야기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는 것이 그 증거이다. 한 사례로 사슴보호 캠패인을 예시로 들 수 있다. 균형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던 먹이사슬을 깨고 사슴을 잡아먹는 포식자들을 조절하자 사슴의 수가 급속도로 증가했다. 먹이가 바닥나 버리자 사슴들은 굶어 죽게 되었고 우리의 의도와는 다른 결과가 다시금 벌어지고 만 것이다.최근 현대 사회는 자본주의 세대에 걸맞게 편리성만을 추구한다. 다양한 생명체들로 가득한 푸른 자연이 번거롭고 귀찮게 느껴진 사람들은 이제 하나 둘씩 도시로 떠나며 자연과 멀어져가고 있다. 단순히 멀어지는 것에 그치지 않고 보기 싫다며 제거해 버릴 방법을 논의하고 자연을 멋대로 조종하려 하는 모습이 파다하다. 자신의 본래 고향을 파괴하는 데 급급한 생명체는 지구상에서 인간이 유일할 것이다. 살충제가 비극을 초래할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던 행동 역시 인간의 불찰이고 책임 역시 우리에게 존재한다. 정확히 알지 못한 채 무방비하게 화학약품을 노출시킨 우리 인간의 무지함의 극치를 보여 준 「침묵의 봄」을 읽으며 나 역시 살충제의 역사와 심각성에 대해 인지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살충제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도 많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보통 살충제는 우리의 삶의 질을 높여주는 하나의 긍정적인 수단으로 많이 인식돼 있다. 살충제는 언제나 구입할 수 있도록 준비돼 있고 심지어 우리에게 친근하면서도 익숙한 이미지로 다가온다. 과거에는 생태계를 비롯해 환경을 무자비하게 파괴한 주범인 살충제였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태연하게 벌레로부터 환경을 지킬 수 있다며 수요공급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책을 읽고 난 후 실제 사람들이 살충제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궁금해 살충제를 구매한 사람들의 후기를 살펴본 바 있다. 밭을 일구는 한 농부가 호스로 살충제를 대량으로 뿌리고 있는 모습을 사진으로 올렸다. 벌레가 생기지 않기를 바란다며 구매 후기를 게시한 것을 보고 마음이 오래도록 불편했다. 살충제로 인해 벌레를 볼 수 없어 기쁘겠지만 살충제가 뿌려진 땅은 몇십 년이 넘도록 고통받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오랜 시간 동안 축적되어 땅은 병들고 그 땅에서 자라는 일부 생명체들 역시 죽어갈 것이 뻔했다. 그렇다고 해서 살충제를 마구 뿌리는 사람이 잘못되었다고 그들을 손가락질하고 싶지는 않다. 비난을 받아야 할 대상은 그 살충제를 손에 쥐고 있는 업체들, 더 나아가 살충제 유통에 있어 제한을 두지 않는 정부의 문제도 뒤따른다고 본다. 그 위험성을 알고 있으면서도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환경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무관심한 공급이 정말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 살충제에 대한 위험성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고 그만큼 나 자신이 얼마나 자연의 소중함을 간과했는지 알 수 있었던 조금은 부끄러운 시간이었다. 사람들은 살충제로 인해 과거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는다.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고 순간적인 효과를 기대하며 살충제 이용에 있어 거리낌이 없다는 것이 현실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환경은 끊임없이 파괴되고 있고 우리는 되돌아갈 수 없는 길을 걷고 있다. 정말 이번 농사가 잘 되기를 오래오래 바란다면 살충제의 사용을 일부 금해야 할 것이다. 일시적으로 편리함을 안겨 주는 만큼 후엔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하는 살충제 대신 비교적 안전한 방법을 쓰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 될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 자연적인 먹이사슬을 이용하는 것이 환경을 아끼는 첫걸음이 될 것이고 살충제로 인해 벌어지는 피해를 막아야만 할 것이다. 자연에 존재하는 여러 생명체들을 존중하고 그 자체로 이해한다면 보다 나은 환경이 되어가지 않을까 싶다. 책을 읽으며 살충제가 끼치는 영향을 넘어 미래 우리의 후손들을 위해 현재 살아가는 지식인들이 환경 문제에 대해 진중하게 생각해 보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었다. 푸른 지구 위에서 생생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는 지난의 과오를 반성하며 미래를 위해 현재에 충실해야 할 것이다. 한때 당연하게 여겨졌던 새의 노랫소리가 더 이상 들려오지 않을 때 그제야 우리는 그들을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자연의 소리를 통해 사계절의 흐름을 체감하는 그야말로 자연스럽게 자연의 만물로써 살아갈 수 있는 하나의 인간이 되고 싶다. 「침묵의 봄」을 읽으며 나 역시 벌레에 대해 과도한 예민함을 보이지 않았는지 다시 한번 나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시야에 들어올 떄마다 그저 성가시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기피하고 필요 이상으로 혐오했던 지난 일이 떠올랐다. 하나의 생명을 그저 나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앞뒤 문맥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무분별하게 죽이려고만 들었던 나의 행동을 반성하게 되었다. 어쩌면 우리는 편리함에 익숙해져 거슬리는 대상을 없애버리는 데 너무 익숙해진 것은 아닐까? 당장에 닥친 문제만을 해결하기 위해 그 위험성과 추후에 벌어질 사태를 외면하는 것이 어색하지 않은 현대인들에게 「침묵의 봄」이라는 책을 권한다. 환경 파괴에 대한 근본을 담고 있으며 해결 방안을 암시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농약과 살충제에 대해 모두가 안전해질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글쓴이 허브

개인의 목소리가 사회의 보편이 되기를

영화로 쓰는 러브레터이채원 저 | 북치는마을 | 2019년 06월 30일영화는 어떤 모습이든 감독과 작가, 배우의 자기 표현의 장(場)이다. 그렇기에 모든 사람들이 자신만의 인생을 살고 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단 한 명도 같은 삶을 살고 있지 않지만, 현재의 우린 같이 살아가고 있다. 그것은 일반화, 혹은 보편화된 어떠한 개념들로 우리의 문화나 역사에 녹아들어 오늘날의 모든 관계에 녹아들어있다. 그것을 꼬집어 고발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탁월한 방법이 바로 영화이다. 이 책은 그러한 영화를 향한 또 다른 자기주장이다. 정확히 영화라는 매체의 특징이다.30여 편의 영화의 짧은 줄거리로 독자의 이해를 돕고 주제에 대한 탐구로 들어가는 내용이 총 268쪽. 어찌 보면 영화가 평균 2시간인데도 너무 짧지 않나, 했지만 그 영화들은 그것마저도 간절히 원하던 사유였을 것이다. 저자를 아는 입장이라 마치 다시금 그분께 강의를 듣는 과거의 나로 돌아간 기분으로 책장을 넘겼다. 과연 저자의 주장은 내게 무엇을 남길까? 그것을 넘어서 난 과연 내 생각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사회는 사람들이 생존을 위해 만들어진 집단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사회문제라 하면 사회에 속한 사람들 모두가 겪는 심각한 문제로 볼 수 있다. 조속한 해결이 필요하지만 가장 느리게 변화되기에 해당 문제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하고, 분명히 문제의 뿌리를 뽑을 만한 해결법이 제시되어야 한다. 그리고 몇몇 문제들은 이미 제시되었다. 그저 그것을 받아들이고 적응시킬 사회원들이 남았을 뿐이다.유토피아를 꿈꾸며 사회문제 타파를 소원하는 것은 아니다. 학교 내에서 보면 학교 폭력, 국가 내에서 보면 차별 문제, 세계적으로 보면 전쟁과 난민 문제 등으로 모든 사회문제는 결국 이어져 있음을 알기에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예방할 수 있고 완전히 단절시킬 수 있는 문제임에도 계속 발생하는 이유는 사회원 모두의 동의와 인정, 적응을 받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힘이 뭐 얼마나 크다고, 하며 눈을 돌리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다.하지만 지금 우리가 누리는 모든 문명의 것들과 우리의 인간관계 모두, 정말 모든 것이 그 문제들을 하나하나 해결하여 여기까지 왔으며, 그걸 위한 힘이 한때는 백성(百姓)이라고 불리고, 서민(庶民)이라 불리고, 하층민(下層民)이라고 불리었던 어리석고 아는 게 없는(民) 사람들에게서 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곧 우리의 힘이고, 우리는 지금도 국민(國民)이라 불린다.
글쓴이 하이데나

당신은 과연 침팬지를 이길 수 있습니까?

팩트풀니스 - 우리가 세상을 오해하는 10가지 이유와 세상이 생각보다 괜찮은 이유한스 로슬링, 올라 로슬링, 안나 로슬링 뢰룬드/김영사<팩트풀니스> 책을 읽었다. 팩트풀니스의 뜻은 ‘인간은 세상을 왜곡해서 바라보는 10가지 본능을 가지고 태어난다’이다. 그래서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고정관념대로 현실을 인지하고 파악하게 된다. 이 책에서는 10가지 개념을 사례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내가 가장 인상적이었던 내용은 ‘간극본능’이다. 간극본능은 인간은 양극단만 치우쳐서 보게 된다고 이야기한다. 우리나라에서 정치를 보게 되더라도 너는 좌파냐? 우파냐?처럼 양쪽으로 치우쳐진 이분법적으로만 생각하고 판단을 한다. 이렇게만 된다면 극단적인 결론으로 이어질 수 있다. 책에서는 국가의 빈부 등급을 나눌 때 선진국과 후진국으로 나누는 것이 아닌 4단계로 나눠야 된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국가의 재정 상태를 건물에 비유했을 때 높은 건물 꼭대기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자그마한 건물들의 차이를 식별하기 어렵다. 마찬가지로 4단계 사람이 세상이 부자와 가난한 사람 두 부류로 나뉜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우리는 별다른 생각 없이 항상 그런 구분을 한다. 아프리카를 예시로 들면 우리는 국민 상위 10퍼센트가 전체 소득의 40페센트 이상을 차지한다고 알고 있다. 따라서 불평등하고 빈부격차가 심하다고 여긴다. 하지만 실제 그래프로 표현하면 중산층 비율이 높고 하층과 상층은 적은 비율이다. 점점 발전하는 사회의 양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양극단만 보고 판단하기 때문에 브라질을 왜곡해서 인지한다. 그런데 여기에 일조하는 것이 바로 ‘언론’이다. 언론은 팩트를 보도할 때 상위 10퍼센트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상위 0.1퍼센트의 모습을 보도한다. 따라서 간극 본능을 억제하기 위한 방법은 다수의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보면 세상을 조금 더 다르게 보일 것이다. 그 다음은 ‘크기 본능’이다. 사람들은 어떤 것을 크게 부풀려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여기서 들 수 있는 예가 2007년 세계 경제 포럼에서 유럽 대표 중 한 사람이 이산화탄소 배출의 책임을 중국, 인도에 돌린다. “우리는 중국과 인도에서 무공해 에너지를 사용하도록 조치해야 합니다. 석탄 에너지를 무공해 연료로 바꾸는 해법을 강구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이에 인도가 반박을 하는데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인도, 중국의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많다고 하는데 첫번째, 지난 100년간 이산화탄소를 배출해서 기후 상태를 악화시킨 주범은 유럽이다. 두번째, 인구 비례로 나눠보자. 예를 들어 중국 14억명 몸무게와 미국 3억명의 몸무게를 더해서 중국이 미국보다 높으면 중국의 비만도가 더 높다는 것과 같은 주장이다. 여기서 여러가지 비율을 비교한 뒤에야 그것이 정말 중요한 수인지 판단할 수 있다. 단편적인 것만 보고 수치를 판단한다는 것은 왜곡된 결과를 야기할 수 있다.이 책에서 인간이 어떻게 세상을 왜곡해서 인지하고 판단하는지에 대한 내용이 흥미로웠다. 특히, 간극본능에 대한 설명이 깊은 인상을 남겼다. 양극단으로만 사고하는것이 어떻게 극단적인 결론을 야기할 수 있는지를 책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정치적 논쟁이나 사회 문제에 대한 논의에서도 이러한 간극 본능이 잘 드러난다는 것을 느꼈다.또한, 우리가 어떻게 왜곡된 판단을 내리는지를 되돌아 보게 되었다. 더 나가아 이러한 왜곡을 극복할 수 있는지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었다. 간극본능과 크기 본능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관점에서 사고하고, 단순한 수치나 크기에만 의존하지 않고 심층적인 분석을 해야 한다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글쓴이 관리자

친구도 가족도 아니지만 우린 외롭지 않아.

강변의 무코리타, 오기가미 나오코2021 · 가족/드라마 · 일본     단편 소설을 읽는 느낌이 들었다. 인물들이 실존한다고 느껴지고 나는 그 세계를 잠시 엿본 것 뿐인 기분. 다른 차원에서 이들은 마을을 꾸리고 가족을 만들고 인간을 수용하며 존재한다. 이 영화에서 인물은 이토록 정교하고 촘촘하게 구축된다. 인간이 할 법한 행동과 생각을 하고 나는 그 인간을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을 하지않아도 자연스레 캐릭터를 통해 자체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받아들임은 이해의 차원을 넘는 감각을 제공한다. 그 캐릭터가 인간답게 느껴질 때에서야 이해를 차치하고 우선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세상엔 이런 저런 생각을 가진 인물이 넘쳐나므로. 이해하지 못할 감정과 생각을 애쓰며 이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다.   이런 입장의 독자와 상반되게 캐릭터는 스스로 자신을 이해하는 과정을 거친다. 주인공이 자신을 모멸하고 웃을 자격이 없다 생각하고 무기력하게 지내고 스스로를 학대하는 삶을 살아도 인간을 이해하려는 노력, 자신을 다독이고 싶은 욕구, 사랑해 보고자하는 사소한 꿈틀거림을 방관하지 않는 삶을 결국엔 살려고 한다.   ​ 단지 소심하고 사회성이 없을 뿐인 것 같은 인물의 일상을 보여주며 영화는 전개된다. 거리낌도 없고 염치도 없이 자신을 대하는 모습이 조금 불편한 이웃집 사람과 갑자기 죽었다고 연락이 온 남인 아버지, 과한 믿음과 의지를 주는 공장 사장. 꽉 닫힌 생활을 하는 야마다의 삶은 거절과 침묵으로 가득하다. 감각적인 미장센은 현실의 잔혹함과 평화로움을 교차해가며 제시한다. 미적인 화면 구성, 정적인 풍경, 고요한 마을과 대비되게 오징어가 뭉텅이로 통에 담기는 장면, 피웅덩이 속에서 구더기가 꿈틀대는 장면, 죽인 모기를 과도하게 확대하여 보여주는 장면 등 부정할 수 없는 사실과 당면한 현실을 다소 그로테스크하게 비추어 보인다. 이런 특이점들은 잔잔하게 꿀렁이는 전개 속 불쑥 튀어나오는데 이 사소하고 주변적인 특이점들이 영화를 형성하는데 있어서 큰 영향력을 준다고 느꼈다. 일상적 언어와 평온함이 주맥락을 이루는 가운데 삶의 모순점을 드러내는 이러한 연출은 영화의 재미 중 하나이다.     야마다의 심리적 거리감은 영화를 이루는 모든 요소를 통해 감각할 수 있다. 겁이 많고 남들과의 유대를 즐기지 않는 야마다는 다소 멀리에서 카메라를 통해 보여진다. 가끔의 바스트샷을 제외하면 전신샷 혹은 측면, 후면의 비율이 높다. 마음이 허물어졌다고 느낀건 야마다가 먼저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다. 야마다는 그 후 웃기도 짜증내기도하며 변화해간다. 이 마음의 벽을 깨부수는 건 옆집의 시마다상이다. 시마다상은 자신이 가난하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 오히려 과시한다고까지 느껴지며 뻔뻔한 태도를 유지한다. 야마다는 이런 시마다상이 여전히 불편하고 짜증나지만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시덥잖은 이야기를 하고 같이 밥을 먹으며 그의 존재를 삶 안으로 들인다. 특별히 크고 거대한 이유가 없음에도 일상 속 스며듦을 통해 세상의 틈새를 뚫은 것이다. 이 영화의 가장 소중한 부분은 이런 무던함인 것 같다. 죽음의 무게를 결코 무겁게 생각하지 않고 삶 속에 녹여듦으로서 결국엔 *사는 이야기*를 한다.     영화의 인물들은 각자 개인에게 의미있는 인물들의 죽음을 경험한다. 아들, 남편, 아버지, 혹은 오래 보았던 이웃집 할머니. 이들의 추모 방식은 제각각이다. 누구는 이야기하기 벅차 잊혀지길 바라고, 누구는 그 죽음의 실체를 알아보고자 하고, 누구는 그의 뼛조각으로 성적행위를 하기도 한다. 이 모든 것에 정답이 있을까. 사회에서 용인되지 않고 상식적으로 있을 순 없다고 해서 정말 옳지 않은 것일까. 각자의 생각이 있고 각자의 주관이 있듯 각자의 방식도 있는 법이다. 이것이 모든 다양성을 포괄하고 있다고까지 말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이 인물들은 이러한 극복 방식을 택하고 감당하구 있구나 하는.   추모는 결국 살아가는 사람의 위로의식인 것이고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우리의 일부이자 본질로의 회귀, 초석이다.   ​ 기존 주민들과 다르게 다소 늦게 연립주택에 들어온 야마다는 작은 세계의 이방인이다. 스스로를 고립시키려하는 것으로 세계와의 타자가 되려 노력한다. 그러나 그 노력이 무색하게 야마다는 금세 융화되었고 융합되었다. 이 장치는 ‘죽음’이다. 오래 전, 죽었다던 옆집의 할머니가 야마다 앞에 나타나 상당히 지극하게 일상적인 인사를 건넨 것이다. 이를 들은 다른 주택 사람들은 ‘그 할머니는 자신이 죽은 것인 줄도 모를 것이다.’ 하며 그리워한다. 이 연립주택의 주민들은 월세도 밀리고 묘를 팔기도 텃밭을 가꾸며 하루하루를 겨우 살아가는 인간들이다. 누구에게 이천만원은 개의 묘비값인데 누구에게 이천만원은 몇달치 집세이기도 하다. 가난과 죽음은 이 영화에서 비슷한 온도로 존재한다. 닥친 현실이고 나를 이루는 구성 요소이고 삶에 영향을 주는 것이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삶과 죽음, 가난과 부, 인간과 외계인, 양분된 존재이지만 결코 배타적인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은 모든 것에게 스며들며 원을 이루고 이 원은 어떻게든 데굴데굴 굴러간다.   ​ 영화가 문학적이라고 느껴졌던 이유는 동화 같은 은유 때문이다. 은유가 아니고 단지 맥거핀일 수도 있다. 이 영화의 가장 사랑스러운 점은 주변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중심은 어쩌면 존재하지않고 주변들의 집합이라는 것을 주제를 통해서 인물을 통해서 그리고 영화 전체를 통틀어 내내 설명하고 있단 생각이 들었다. 외계인과의 통신을 시도하는 아이들, 영혼을 금붕어 모양 구름으로 전달하는 상담원, 묘를 판 후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소고기스키야끼 먹기, 불꽃놀이의 추모, 사탕껍질로 만든 조그만 학 같은. 모든 사소함이 동화같은 은유가 된다.   ​ 사랑하는 법을 잊은 것처럼 가혹하고 엄격하게 자신을 대하던 주인공이 자신을 비로소 연민하게 됐을 때 나 또한 그 감정에 동조되어 주인공을 연민했다. 불쌍하고 안타까운 동시에 사랑에 관한 미세한 동요를 감각해버린 것이 사랑스럽다가도, 그대로 안쓰럽게 남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억울함을 억누르며 살아가다 단비를 한방울 마셔본 후에야 비집고 튀어나온 눈물, 분노, 원망을 나는 사랑하지 않을 자신이 없다.
글쓴이 관리자

세상에 옳은 문장은 없다.

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 : 내가 쓴 글, 내가 다듬는 법김정선 저 | 유유 | 2016년 01월 24일   책은 크게 두 종류의 내용으로 나뉜다. 하나는 책의 저자가 독자들에게 도움이 될 팁들, 그러니까 문장을 정돈하는 데 참고사항이 될 정보와 수정 예시를 늘어놓는 부분이다. 책에 대한 내용을 전혀 모르고, 어렴풋히 극찬하는 추천사로 책을 접한 나는 이 내용이 책의 전문이리라 예상했고, 보기 좋게 틀렸다. 다른 한 내용이자, 책을 읽으며 일종의 별미이자 매력점처럼 자리잡은 내용은 바로 책을 쓰게 된 계기로 예상되는 일화다. 에세이 보다는 일종의 주인공 1인칭 시점 소설에 가까운 글이었다. 저자는 '함인주'라는 번역가의 글을 편집했다. 아니, 사실 크게 생각치는 않았다. 문장이 경직되고, 정돈되어 있어 기억에 남았을 뿐 함인주씨의 글을 단독으로 맡은 것은 아니었다. 정확한 상황은 모르겠으나, 다른 번역가들의 글도 편집했기에, 그 특징만 흐릿하게 남았을 뿐 저자는 깊이 생각치 않았다.   생각이 시작된 것은 한 메일이었다. 으레 감기에 시달리는 시기, 으슬으슬한 몸을 일으켜 확인한 메일이었다. 함인주씨는 문장을 잘 다듬어 주어 고맙다는 말과 함께 글을 다듬는 기준을 물어보았다.  발신인은 '내 문장을 그렇게까지 고쳐야 했습니까?' 하고 따지지 않고 '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라고 물었다. 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했나요'가 아니라 '이상한가요'라고 현재형으로 물은 것도 특이했다.   -본문 17쪽     특이하다. 그 문장을 써낸 발신인도, 문장의 현재형과 과거형을 알아챈 저자도.   머리말에서부터 매끄러운 문장에 설레던 마음은 이 첫 장을 보고 흔들린다. 당혹스러웠다. 기대하던 내용은 바로 다음장부터 시작하지만, 책의 오프닝이라고 볼 수 있는 작가의 말도, 해당 책에는 없지만 으레 존재하는 추천사도 끝이 나 목차를 넘겼건만. 첫번째 메일, 그 소제목에서 메일은 단발성으로 끝나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순진하거나 평범하게 생각할 수 있지만, 책의 내용이 문학 서적 근처에 꽂혀있을 지언정 그 사이에 꽂혀있지 않다는 이유로. 책의 내용을 실화라 믿어버렸다. 글에는 글쓴이의 생각이 묻어나기 마련이고, 깔끔하게 정돈되어 버벅임 없이 읽고 매끄럽게 이해되는 문장은 사람에 대한 믿음을 높여주었다. 후광효과겠지만, 어쨌든.       언어와 글이라 함은 어떤 의미를 가진 무의미한 것을 교환하는 것이다. 사회적 약속도 사회에 속한 이들에게나 유의미하다. 언어는 유의미하면서 무의미하다. 개나 고양이도 언어를 알아듣는다지만, 그것은 우리가 개의 으르렁거림이나 고양이의 골골송을 이해하는 형태와 유사한 깊이가 아닐까.   예컨대 언어에 있어 무의미와 유의미를 가르는 것은 맥락이다. 그 사람이 어느 사회에 속하고 문화에 속했는가. 그것이 언어가 귀에 들어가 뇌에 새겨지는가와 공기중에 퍼져 사라지는가를 가른다. 의사전달을 위해 탄생한 언어, 그 언어를 통해 인간의 사고는 규제되고 확장된다. 만들어지고 약속함에 있어 쓰임이 생기는 도구에, 능력이 제한되기도 한다니 재밌는 이야기다. 언어는 의사를 전달한다. 고로 정확한 의사전달과 효과적인 공감대 형성을 위해 단어선택은 물론이고 문장의 짜임, 나아가 문단과 문맥의 흐름이 중요해진다. 장편 소설을 읽거나, 단편 소설 중 반전 요소를 자랑하는 것을 읽어본 분들은 공감할 것이다. 작가들은 일상적인 문장을, 단순한 *다녀왔습니다.*를 때론 가슴 찢어지도록, 때론 식은땀이 흐르도록 만드는 사람들이다. 그렇기 위해서는 알고 있는 단어가 많아 정확한 단어를 택하는 것도 중요하나, 저자가 하는 일처럼 매끄럽고 알아듣기 편하도록 문장을 다듬는 것 역시 중요하다.   언어는 어디까지나 의사전달 도구다. 손잡이가 쓸 데 없이 거추장스러운 도끼는 무게중심이 어긋나거나, 사용할 때 팔이나 손목에 걸리는 부분이 생길 수 있다. 저자가 알려주는 요령은 그런 손잡이를 쓰기 좋게 다듬는 것 까지다. 적당한 그립감과 무게중심을 잡는 요령까지만, 효율좋게 쓰는 것만 알려준다.   이런 면에서 개인적으로 저자를 다소... 무심하고 무신경하다고 생각했다. 고작 글 하나 읽은 것으로 아는 체 하는 것이 우스운 꼴이기도 하나, 저자는 정말, 주로 다루는 글은 문학일 것이라고 생각되는데도. *사랑하다* 와 *사랑을 하다* 의 어감차이를 얕게만 다루고 넘긴다. 물론 글의 목적이 이런 다듬기의 요령에 맞춰져있어 그런 것이겠지만. 그럼에도 생각하게 된다. 어느 것이 좋은 문장인가.   강조하여 인물의 특성이나 감정을 강조하느냐, 독자에게 읽기 좋게 변환하느냐. 이 딜레마는 글 좀 건드린다는 사람들 모두에게 찾아오는 딜레마가 아닐까.       아, 뒤늦게야 덧붙이지만 '함인주'씨와 저자가 나눈 메일의 내용 역시 마음에 들었다. 카프카의 소설이 궁금해질뿐더러, 예의를 잘 갖추어 무게감 있으면서 상대와 본인의 의견을 존중하는 언어는 보면볼수록 절묘하지 않나. 그런 언어야말로 진정 배우고 싶었던 '여유'가 아닐까.   읽는데에 시간이 걸렸지만, 책 자체는 길지 않은데다가 적당한 순간에 끊는 소설은 흥미를 북돋운다. 개인적으로 학창시절 언어와 매체를 들은 분들께나 추천하고 싶다. 문장을 다듬기 위해서는 불필요한 중복 서술을 지우고 생략된 부분을 찾아야하는데, 필연적으로 문장의 구성성분 용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익숙치 않은 사람은 거부감을 거하게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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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밤의 객

창작 소설 | 야밤의 객공기가 말라 하루만 내놓아도 빨래가 마르는 시기가 지났다. 공기중에 매달린 습기는 모래주머니라도 찬것처럼, 혹은 기압에 더불어 수압도 받는 것처럼 몸을 무겁게 만든다.아침에 일어나기가 버겁고, 밤에 잠드는 것이 아쉽다.그렇다, 여름이 왔다. 방학시즌이 돌아오고 있다.방학을 맞이해 대부분의 학생들이 으레 그렇듯, 나 역시 일찍이 자취방을 떠났다. 본가로 돌아오는 길에는 대전역에서 산 성심당 종이봉투가 들려있다. 아직 달달한 것을 찾는 내 입맛에는 특별치도 않게 느껴지지만, 부모님은 슬 담백하고 적절한 맛을 찾을 나이가 되신듯하다.학기 중에는 약속이니, 영화니 하며 곧잘 내려오기 힘든 본가다. 익숙한 방은 책상에 먼지와 과자가 늘어졌을 뿐 변한 것이 하나 없다. 가방에서 짐을 하나하나 꺼내 책상 위로 늘어놓고, 침대에 누웠다. 오늘은 지쳤다. 간만의 귀가로 모든 기력을 소진한 것이 아니다. 20대 초반의 체력은 그리 만만치가 않다. 다만 인간적으로 소주 1병에 맥주 2잔을 마시고 노래방 1시간을 뛴 상태에서 본가까지 버스타고 잘 내려온 정신력이라면 뭘 해도 될 놈이 아닐까. 나는 뭘 해도 될 놈이구나... 지쳐 늘어진 근육만큼 뇌세포간의 신호전달도 느슨해져 해괴한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해댄다. 그나마 주둥이를 움직일 기력이 없어 머릿속에서만 맴돈 생각임이 다행이었다.저녁도 거르고 늘어진 자식을, 부모님은 부러 깨우진 않으신다. 저녁을 치우고 거실불을 끄는 김에 내 방에 들러 조용히 방의 불을 끈다. 문을 닫지 않는 것은 날이 후덥지근해서다. 바람은 통해야하니까.그렇게 숙취와 여독에 절여진 뇌를 깨우는 것은 새벽 2시경의 빈 속도, 때아닌 부모님의 잔소리나 옆집 시츄의 외침도 아니었다.찰박, 찰박.물소리에 불현듯 눈이 뜨인다. 주변은 어두컴컴하다. 머지않아 어둠에 적응한 눈이 사물의 윤곽을 잡아낸다. 내 안경, 안경이 어디있지? 누워있던 몸을 일으키고 주변을 쓴다. 침대보는 습기를 먹어 눅눅하다. 무언가 손에 걸린다. 모서리가 둥그렇고, 묵직한 네모와 익숙한 그립감. 핸드폰이다. 후레쉬를 켤 요량으로 전원버튼을 눌렀다. 바깥에 울리는 개구리 울음소리에 버튼 딸깍이는 소리가 묻혔다.전원이 나갔나, 아쉬움에 한숨이 나왔다. 대충 침대 아래로 몸을 기울여서, 방바닥에 떨궈놓은 충전기를 더듬거리며 찾았다. 찰박, 찰박. 다시금 물소리가 들린다.우리 집이 시골이긴 하지, 당장 밖에 개구리 우는 소리하며 아침에 들리는 정체모를 새의 울음소리를 생각하면, 그래. 들릴만한 소리다. 으레 새벽에 울려도 이상치 않을 소리다. 물기어린 맨 발이 바닥에 찰박대는 소리는.어느새 멈추었던 손을 다시 휘적인다. 아, 잡았다. 전선 중간을 붙들어 조심스레 죽 빼내니, 연결하는 부분이 손에 걸렸다. 충전기에 꽂은 폰을 침대 아래에 내려놓고, 다시 안경을 찾으려 상체를 세웠다.찰박찰박찰박. 가만 생각하면 이상하지 않나, 밖에 불어오는 바람은 상쾌하기 짝이 없고, 개구리 우는 소리에는 빗소리가 섞이지 않았다. 습기를 머금은 침대보도, 장마기간이 다가와 비가 올락말락하는 날씨에 이런 것이지 일기예보는 내일 점심즘부터 비가 온다고 했다.누가 씻고 나왔나보지, 괜스레 힘이 들어가는 몸을 삐걱거리며 침대에 누웠다. 개구리소리가 유독 크게 들린다.개구리야 개구리야 왜그리 우니?엄마 무덤 떠내려갈까 운다.그러게 부동산을 잘 봤어야지, 저기 황새네는 침수걱정 없는 집이라던데.이게 뭔 소리야. 얕게 든 선잠에 스스로 황당해 일어났다. 다시 찰박이는 소리가 들린다. 찰박찰박찰박. 그 발소리는 문 바깥에서 울린다. 멀어졌다가, 가까워졌다가. 거실을 이곳 저곳 돌아다니는 것처럼 발소리가 멎고 다시 들리기를 반복한다.이상하지 않아? 선잠에 얼마나 들었는지는 몰라도, 물이 아직도 안 마르는게 말이 되나? 떠오르는 질문에 스스로 고통받기 시작한다. 아, 밤에 괴담썰도 보지 않는 제게 어찌하여 이런 시련을 주시옵나이까. 머리를 굴린다. 물을 다시 적셔왔나? 겠나요, 학생. 정신차리시길 바랍니다. 겨우 꺼내온 가능성은 채 펼쳐지기도 전에 단호한 혹평을 받는다.찰박찰박찰박찰박, 걸음이 점차 가까워진다. 의식하지말자, 의식하지말자. 눈을 다시 감고 명상을 시작한다. 이러다보면 잠들겠지. 쪽팔린 중학교 시절 흑역사나 다시 떠올리고 있을까? 현실 괴담과 과거사 중 어느 것이 더 끔찍한지 고민하던찰나, 후각세포가 의견하나를 내놓는다.물비릿내 나는데?소리만큼 냄새도 가까워진다. 비냄새와는 선뜻 다른, 고인 물에서 나는 썩은 냄새가 비강을 습격하기 시작한다..! 삐걱, 하고 문지방이 밟히는 소리가 났다.아, 뒤돌아 누울걸. 지독한 냄새에 반사적으로 구겨지는 인상을 최대한 펼친다. 나는 잠에 들었다, 잠든상태, 멜라토닌 열일중. 별별 헛소리를 뇌까리며 자기최면을 걸었다. 눈을 감아도 느껴지는 인기척이라는 것이 있다. 한참이나, 내 방 문지방 위 인기척은 사라지지 않았다. 슬슬 물비릿내에도 적응될 즈음, 그리고 머릿속의 행복회로가 다시 불살라지며 이 모든게 꿈이었다는 해피완벽 엔딩을 상상하기 시작할 즘."자는 척 되게 못하네."심장이 철렁인다. 목소리는 생전 처음 듣는 것이고, 잔뜩 겁에 질렸으니 나잇대나 성별은 어찌되어도 좋았다. 눈을 떠 낯선 사람, 혹은 존재가 우리 집에, 내 방 앞에 서있다는 상황을 마주하기가 두려웠다."자는 사람도 인상은 쓰거든? 다음엔 잘 해봐."첫마디에 아뿔싸, 그렇구나. 깨달음을 얻은 뒤 이어지는 문장에 다시금 생각이 숭덩숭덩 잘려나간다. 네? 다음? 다음이요?눈을 뜨고 질문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지만, 황당함에 들은 말을 곱씹으려던 중 다시금 발소리가 들린다. 찰박찰박찰박, 황당한 일본 공포게임마냥, 찰박찰박, 발소리가 멀어진다...아침, 거실에서 들리는 청소기 소리에 눈을 뜨자 엄마가 빵이라도 먹겠냐며 물어온다. 전날 사들고 온 빵에 두유를 먹었다. 이름도 모르고 막 집어온 빵이 생각보다 맛나서, 느낀대로 이야기하니 배고픈데 뭔들 안 맛있겠냐는 답이 돌아왔다. 맞는 말에 빵을 마저 먹었다.절반즘 먹었을까, 엄마는 청소기를 마저 돌리셨다. 아니지, 물걸레구나. 앞에 달린 동그란 걸레 두개가 빙글빙글 돌며 바닥을 닦아주는 전동 대걸레였다. 사실 명칭은 모른다. 엄마가 사서 엄마가 쓰는 물건이니까."아이고, 새벽에 누가 들어오기라도 했나. 바닥이 온통 흙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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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속할 것을 정한다면 우리가 되겠다.

우리가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때: N번방 추적기와 우리의 이야기추적단 불꽃 저 | 이봄 | 2020년 09월 23일일명 박사라고 불리며 박사방을 운영한 조주빈과 갓갓으로 N번방을 운영하던 문형욱을 기억하는가? 그들은 성인, 아동 가릴 것 없이 피해자들을 불법으로 촬영한 것뿐만 아니라 협박을 통해 성착취까지 저지른 성범죄자들이다. 그리고 그들의 소굴에 직접 잡입하여 그들의 존재를 최초로 알린 영웅이 있다. 바로 이 책을 쓴 저자, 추적단 불꽃이다.디지털 성범죄는 2020년 N번방 사건을 기점으로 많은 관심을 받게 된 유형의 범죄이다. 이 범죄가 이렇게 악명이 높은 이유는 가해자들의 익명성이 보장되고, 수많은 가해자가 피해자들을 상대로 성착취를 편리하고 안전하게 강요하며 연대를 이루기 때문이다. 더해서 한 번 유포된 피해자들의 사진, 영상, 개인정보는 거의 영원토록 디지털 세계에서 떠돌아다니면서 피해자들에 대한 2차 가해를 초래한다. 이러한 점 때문에 추적단 불꽃은 1년 동안 그들의 방에서 사건 자료를 수집하여 경찰에 신고하고 피해자들에게 피해 사실을 알리며 도움을 건네왔다. 이렇게 간략하게 정리하니 이 사건이 가볍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여전히 한국에서는 여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람이 죽어간다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이 책을 통해 가해자들의 연대라는 것을 당장 하루라도 빨리 없애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피해자들의 2차 가해에 대한 위험성에 대한 경각심도 들었다. 사람은 사람과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분명 사람으로 태어났건만 사람으로 취급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이유는 이미 우리 모두가 알고 있지만 아직도 외면하고 있다. 내 책임이 아니라서, 인력이 모자라서, 시간과 돈을 너무 많이 낭비해서. 그 말들의 근본에는 자만이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내 지위는 공고할 거라는 자만. 간절히 애원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느끼는 저열한 우월감. 그것이 그들이 무시라는 행위를 선택하는 동기이다. 하지만 그 또한 하나의 선택이며, 그 선택에 대한 대가는 반드시 치루게 될 것이라 알려줘야 한다. 가까운 사람이나 혹은 나 자신의 신상이 디지털에 뿌려지고 가해자들의 작은 말풍선 속 말 한마디로 거래되는 별 거 아닌 것으로 치부된다 해도 계속 그 자세를 끝까지 유지할 수 있는지 보자.다시 한 번 더 성범죄의 근본이 무엇일지 고민하자. 생각하기 싫고 외면하고 싶어도 마주해야 한다. 피해자들도 우리와 별반 다를 게 없는 평번한 사람들이었으며, 그들 또한 누군가에게 소중한 가족이자, 친구이자, 사람이었을 테니까 말이다. 피해자들이 그런 옷을 입어서, 그런 계정을 만들어서, 그런 곳을 들어가서, 그런 웃음을 지어서... 다 헛소리다. 평범하게 살았고, 내일도 이처럼 살아갈 것이라 믿었던 피해자들의 일상을 완전히 무너뜨린 가해자들의 그런 짓들이나 막아야 한다. 그들이 하는 말, 하는 행동에 대하여 제약을 걸고 그들의 미래를 제한해라. 가해자들을 막기 위한 방도는 이미 다 알고 있다. 심지어 누구에게나 충분히 갖고 있는 능력이다. 하루 24시간 중 10분도 안되는 작은 관심, 평소 말하는 수만 마디의 말 중 단 한 마디로 가해자들을 압박할 수 있는 사람들. 그것이 우리다.
글쓴이 하이데나

이상함을 마주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용기

천지신명은 여자의 말을 듣지 않지김이삭 저 | 래빗홀 | 2024년 06월 12일딱 한 번 신기한 것을 본 때가 있었다. 언니와 함께 방을 공유했던 정말 어렸을 때였다. 문이 방의 옆에 있었고, 우리의 침대는 각각 방의 양옆을 차지하여 평행을 이루었다. 그래서 우리 자매는 가끔 침대를 붙여서 같이 밤을 즐기다가 부모님께 들켜서 급히 떼어놓기도 했다. 그날도 우리 침대에는 한 사람이 지나갈 만한 길목(?)이 있었다.   왜, 그런 날이 있지 않은가. 내가 왜 갑자기 잠에서 깬 건지 알 수 없어서 비몽사몽 거리며 눈을 깜빡거릴 때. 내가 그랬었다. 아주 깊은 밤일 것이 분명하고, 창문으로 아파트 주차장의 가로등 빛이 새어 들어오는 것으로 주변을 살피며 내가 왜 일어난 건지를 알아내려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고 있었을 때였다. 우리 자매의 침대의 길목에 무언가가 서있었다.   지금도 기억난다. 잠을 자고 있었던 터라 안경을 쓰고 있지 않아서 물체는 확실히 보이지 않았지만, 무언가가 서 있었던 것은 확실했다. 그도 그럴 것이 너무도 확연히 하얀 것이 길게 서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우리의 방에 저런 것을 걸어놓지도 않았거니와 놓을 수도 없게 그것은 언니의 침대 쪽에 붙어서 서 있었다. 즉, 다니는 길목에다 우리가 무언가를 걸어놓을 리가 없으니 그것은 정말로 존재해서는 안되는 곳에 존재하는 무언가였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보기도 전에 수마가 날 덮쳤다. 궁금증보다 잠에 취한 내 눈꺼풀이 이긴 셈이다.   그렇게 자고 일어나서 침대에 일어난 나는 곧장 언니의 침대 쪽을 바라보았다. 역시나 없었다. 하얀 것은 존재하지 않았고, 무언가를 걸어 놓거나 쌓아 놓은 것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별로 무섭지 않았다. 보긴 봤지만, 그것이 날 해하지도 언니를 해하지도 않았고 잠도 달디달게 잘 자고 일어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커서 그것이 사람이었다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어릴 적 담임 선생님이 말씀하셨던 집에 강도가 든 사건을 무서워했던 나는 오히려 사람보다 귀신이 덜 무서웠을 것이다. 지금도 그 생각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귀신은 그저 거기에 서서 누군가 자신을 바라보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뿐, 해코지 하지 않을 것이다. 어린아이가 자다가 소리 지르는 게 웃기고 어이없겠지만 그것뿐이었겠지. 하지만 사람이라면? 소리 지르는 즉시 그 사람은 무언가를 저질렀으리라 생각하니 역시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책에서도 그렇다. 가장 무서운 건 안정된 집단을 이루며 규칙이라는 질서로 사람들 간의 선을 그으며 그 밖의 존재들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사람들이다. 사람은 사람이 없다면 살 수 없다는 것이 당연하지만 나는 어쨌든 사람을 가장 많이 죽인 것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상함을 마주할 수 있는 용기가 사람에게서 나올 수 있다. 내가 어릴 적 귀신이라고 생각되는 그것을 마주했던 것은 쏟아지는 잠뿐만 아니라 옆에서 자는 언니, 그리고 옆방에서 주무시는 우리 부모님 덕분이었다. 용기로 이상함을 마주하여 상대방을 이해할 것인지, 혹은 용기로 이상한 상대방을 배척하여 ‘우리’를 공고히 할 것인지 어떤 것이 더욱 오래 이어질지는 다양성을 주장하는 말들을 보면 확연히 보인다.
글쓴이 하이데나

괴물은 태어나는가, 만들어지는가

사이코패스 뇌과학자 / 제임스 팰런 저자(글) · 김미선 번역더퀘스트 · 2020년 09월 23일 사이코패스란 무엇일까? 그 단어는 어느 순간 잔혹한 살인범을 의미하는 것에서 점점 냉혹한 성격이나 사람의 감정에 공감하지 않아 상처를 주는 사람을 말하는 포괄적인 의미로 넓어졌다. 드라마 <도깨비>에서 김신이 지은탁에게 말하듯 사람 마음을 콕콕 찌르는 사람이 정말 사이코패스일까?이 책은 그야말로 사이코패스가 무엇인지, 그러한 사람은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는지, 더 나아가 사이코패스를 현대 사회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를 말한다.시작은 한 연구실에서 벌어진 한 사건이었다.제임스 팰런은 이 책의 저자로서 자신의 인생을 한 사건으로 풀기 시작한다. 사이코패스 범죄자의 뇌를 연구하는 프로젝트에서 사용된 사이코패스 범죄자의 뇌에 대비되는 정상군의 뇌 사진들을 보고 있던 중이었다. 그 사진들은 제임스 그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 지인들의 뇌 사진이었다. 한치의 의심도 없이 그 모두가 정상군에 속할 것이라 생각했던 그는 그 중 하나의 사진이 충격적이게도 명확한 사이코패스 범죄자와 동일한 특징을 가지고 있음을 발견하다. 그 사진의 암호를 풀어 그 뇌의 주인이 누군지를 알게 된 그는 그 사실을 믿지 않았다. 그 뇌는 제임스의 것이었다.처음에 그 사실을 알게 된 그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은 너무도 화목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세 아이의 아빠이자, 한 아내의 남편으로서 행복하게 살아왔고, 살고있고, 살 예정이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어린시절 또한 천진난만하고 즐거운 기억으로 가득 찬 그는 자신이 그 흉악한 사이코패스 범죄자와 동일한 뇌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때 그는 자신의 친구들이 자신에게 했던 말을 기억해냈다.“넌 정말 소시오패스야.” “짐, 너는 정말 매력있는 친구지만 신뢰하지는 않아.”제임스는 자신의 어머니에게 어릴 적 자신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렇게 점차 그는 자신의 내면에 살고 있는 괴물에 대한 연구를 이어간다. 그 결과는 책에서 보여주었다. 어릴 적 그는 10대엔 심각한 강박장애가 있었다. 천주교 신자인 어머니를 따라 성당에 다니던 그는 어느순간 독실한 신자를 향한 강박이 생겼다. 자신의 죄를 습관적으로 고해하고, 착한 일을 하더라도 순수하게 타인을 위한 마음이 없다면 그것 또한 죄로 간주할 정도였다. 또한 그 즈음에 사귄 여자친구 다이앤(미래에 아내가 될)과도 스킨쉽을 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그것은 시간이 지나자 사라졌지만, ‘올해의 카톨릭 소년’ 상을 수상받을 정도로 그의 강박관념은 눈에 보일 정도였다.하지만 고등학교로 올라가면서 그는 경조증의 증상을 보였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고, 스포츠 5개 종목에 나가고, 학급광대라고 불릴 정도로 넓은 인간관계를 구축했다. 이는 20대로 올라가자 좀 더 선을 넘기 시작했다. 클럽에 방화를 저지르는 것을 몇 번이고 새벽 내내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그것 또한 사라졌다. 이 시간 동안 그는 공황발작을 했다. 이 때문인지 그는 즐거움을 놓치지 않겠다는 신념을 생긴 듯 행동했다. 그것이 타인에게 상처를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한 채로 말이다.전문 용어로 나열되어 있는 것을 보면 질릴 지도 모르기에 딱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이러한 유년기를 보낸 그는 다른 사이코패스 범죄자들과 확연히 다른 점이 존재한다. 그렇기에 그는 그런 범죄자가 되지 않은 것이다. 바로 ‘어린 시절의 학대’가 그 차이점을 만들었다. 사이코패스의 뇌는 더 큰 자극을 추구하려고 한다. 이를 막을 수는 없다. 그것은 선천적인 결함이기 때문이다. 이 추구행위를 하면서 죄책감 같은 공감도 느끼지 않기에 사이코패스는 거짓말을 잘하고 긴장감을 느끼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 자극에 대한 최대치가 변화할 수도 있다. 바로 학대가 이 최대치를 크게 늘려버린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그 늘려진 자극의 최대치를 채우기 위해 사이코패스 성향을 가진 사람은 더 큰 자극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 그 방법이 학대를 넘어선 살인이 되는 것이 바로 사이코패스 범죄자의 선택이다.또한 사이코패스는 유전자에도 공격적인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 제임스 또한 자신의 부모의 조상을 거슬러 올라가니 미국 식민지 최초의 친족 살인마와 영국의 폭력적인 성향의 존 왕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는 대를 내려오면서 제임스에게 공격성 유전자, 즉 대립 유전자를 물려주었다. 하지만 그는 반사회적 사이코패스가 되지 않았다. 순전히 천주교 신자였던 어머니의 보살핌과 아버지에 의해 보내진 정신 병원으로의 심부름 등 육아 덕분이었다.그는 끝에서 이렇게 말한다. 자신의 성향을 알고 나서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봐왔던 것이 정말 무엇이었는지 알게 되었다고, 상처를 받았다는 것이 정말 상처받았음을, 그 원인이 자신이었음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그가 사이코패스라는 사실이 유명해지자 그를 떠나는 인연들도 생겨났다. 그리고 변화된 인간관계도 있었다. 그것을 모두 떠나 그는 자신의 즐거움은 계속해서 추구하겠지만, 그것을 위해 타인에게 상처를 주지는 않을지 생각해보는 노력을 해보겠다 한다. 물론 지속적인 즐거움을 위해 그것을 게임이라 여기고 있다 하지만 말이다.사이코패스는 범죄자를 양성하는 정신 장애로 보인다. 하지만 친사회적 사이코패스가 말하길, 사이코패스는 자신처럼 하나의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리더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문명의 발전을 이루는 데 큰 공헌을 한 돌연변이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회는 사이코패스를 배제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뇌의 결함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변하지 않을 천성일지라도 그가 공감하는 척 노력을 하도록, 타인의 상처를 생각해보는 노력을 하도록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육아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겠다. 제임스 팰런의 부모님처럼 말이다.
글쓴이 하이데나

자유롭게 뻗는 가지처럼, 글 쓰는 사람의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제목: 공부의 위로지음: 곽아람출간: 민음사 2022년 3월 20일 공부의 위로는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를 졸업한 곽아람 기자가 대학 생활 동안 들었던 20개의 교양 과목 위주의 수업을 1학년부터 4학년까지 순차적으로 엮어 소개하며 수업을 들으며 느낀 점과 수업과 엮인 경험을 이야기하는 책이다.내가 이 책을 읽게 된 이유는 단순히 인터넷에서 바이럴 타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대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읽었으면 좋았을 책’, ‘입학을 앞 둔 예비 새내기들에게 추천하는 책’ 과 같은 내용으로 유행을 타고 있었다.나는 예비 새내기는 아니지만, 1학년 1학기, 2학기 교양수업에서 각각 f학점을 하나씩 받았었기 때문에, 그리고 공부해야 할 동기를 찾고 있었기 때문에 관심이 갔다.결국 책을 읽기 시작하는 것조차 귀찮아 어려운 책이 아님에도 연체일이 다 지나서야 완독할 수 있었다.하지만 지금 책을 막 다 읽은 시점에선, 이 책을 읽게 된 것이 큰 행운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내게 많은 가르침과 감동을 준 책이다.무용한 일에 시간을 투자하고, 쓸모 없는 것을 배우리라 도전하고, 쓸데없어 보이는 일에 노력을 기울이는 것.그것이 대학이라는 공간에서 젊은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특권이자 가장 소중한 가치였다는 걸.그 시절 무용해 보였던 수많은 수업들이 지금의 나를 어느 정도 ‘교양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주었다. (P.117)공부는 쓸모 없는 것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왜 공부를 해야 되는지, 왜 공부가 헛된 일이 아닌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 모를 것이다.공부는 그저 ‘해야만 하는 것’으로 남아있을 수도 있다. 왜 해야만 하는지도 모른 채 말이다.쓸모 없는 것으로 쉽게 여겨지는 인문학 공부를 하던 저자가 고민하고 고민한 경험의 내용으로 나는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어느 정도 얻을 수 있었다.그저 막연하게만 느껴지던 공부의 필요성이 내게도 와닿게 되었다.결국 공부는 잊기 위해 하는 것이었다는 허무를 통해서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그 낡고 허름한 지상의 강의실에서 우리는 천상의 언어를 배우고 있었고, 그 언어는 대부분의 수강생들에게 삶의 잉여였지만 분명 ‘위안’이었다.세상은 우리에게 ‘쓸모’를 요구하지만 유용한 것만이 반드시 의미 있지는 않으며 실용만이 답이 아니라는 그런, 위로. (p.306)모든 내용을 잊어버렸을지라도, 배웠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자만하지 않을 수 있고, 새로운 도전에 대해 두려움이 없을 수 있으며, 실패했던 경험으로 남을 위로할 수도 있다.쓸모없다고 생각했던 모든 공부의 쓸모는 쓸모없다고 여겨졌다는 점에서 온다는 걸 이제는 이해할 수 있다.저자는 스스로가 ‘토끼’가 아닌 ‘거북이’ 유형의 사람으로, 고지식한 성실성이 본인의 특장점이라는 걸 알았다고 한다.늘 자만하고 후회하는 완전 ‘토끼’ 유형의 사람인 내게 그 내용은 크게 공감이 가지는 않았지만, 성실함을 동경해 왔기 때문에 존경스러웠다. 돌이켜보면 나도 좋은 성과를 이룬 것에 대해서는 성실하였었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전혀 다른 유형의 사람 같았던 ‘거북이’ 유형의 저자가 쓴 이 책을 통해 나에게 공부는 더 이상 수레바퀴 아래에 깔리게 하는 ‘두려움’이 아닌, 쓸모없음의 ‘위로’가 되었다.공부를 ‘쓸모’를 위한 과제라고 생각해 어렵다고 느끼는 대학생들에게 권할 수 있는 책이다.한 번도 공부를 제대로 접해보지 못한 나도 쉽게 읽고 공부가 주는 위로를 이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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